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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Sep 17. 2022

사일로 효과와 두번째 이직의 마음가짐

 12년이 조금 넘는 직장 생활 경력에서 최근의 이직까지 포함하여 총 두 번의 이직을 감행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인해 그나마 수월하게 적응 중인 지금의 이직 초반기에 비해, 첫 번째 이직 초반기의 나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를 겪었었다. 좋게 생각하면 첫 번째 이직 때의 따끔한 기억이 예방접종이 되어준 셈이다. 첫 번째 이직 역시 꽤 경력을 쌓은 이후였고 첫 직장과 같은 업무의 연장선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통해 내 안에 쌓인 무형의 자산은 무엇이었는지 복기해 본다.


그 당시의 나는 아무래도 기합이 바짝 들어있었다. 신입이 아닌 경력직으로서 이직이다 보니 빠른 시간 안에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다. 리그의 상위팀으로 막 이적한 축구 선수와도 같은 마음이었다. 나에게 이직을 제안해 준 분에게도 ‘역시 당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하는 증명을 해내 보이고 싶기도 했고, 기존 직원들의 ‘얼마나 잘 하는지 한번 볼까?’하는 경계심 섞인 눈빛들에도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누군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상인 규모의 회사에서 한 명의 이직이 별다른 뉴스가 아니라는 것은 한참 후에나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쉐도우 복싱과도 같은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 조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퍼포먼스의 종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퍼포먼스를 가장 극적으로 낼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함께 프로젝트에 투입된 많은 팀원들 중 가장 돋보이는 1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각자의 아이디어를 브리핑하는 회의를 앞둔 전날 밤은 당연히 가장 늦게까지 일했다. 나의 아이디어를 가장 돋보이게 할 사례와 근거를 조사했다. 간단하게 텍스트로만 이야기해도 될 이야기를 동영상 레퍼런스 편집본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나의 아이디어를 들은 다른 팀원들이 던질 법한 질문들도 미리 예상해 보고 그에 적합한 답변들도 준비했다. 한발 더 나아가 다른 팀원들이 생각해올 법한 아이디어를 예측하고 그 아이디어가 나의 아이디어에 비해 뭐가 부족한지에 대한 논리까지 준비했다. 회의의 히어로가 되기 위한 촘촘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꽤 많은 아이디어 회의에서 계획했던 대로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나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전략을 설계하고 최종 메세지의 방향성이 정해지고 구체적인 아웃풋이 나왔다. 하지만 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 밤새 열심히 작전을 세워가도 나보다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디어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회의 자리가 지나고 난 후에는 노력의 양 이상으로 좌절의 크기가 커졌다. 무엇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회사 생활이 1년쯤 지나고 난 후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최종 결과물들이 남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 엉성하고 억지스러운 결과물들이 남았을 뿐이다.

나의 아이디어를 밀어붙이고자 했던 의지가 독단이 되었고 내가 주도하는 판을 만들고자 했던 작전은 팀워크를 망가뜨리는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 1년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누구보다 돋보이고자 하는 욕심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한 사일로 효과에 빠지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사일로 효과는 회사 내의 각 부서들이 자기 부서의 이익만 추구하느라 다른 부서와 협력을 꺼리고 정보 교환을 차단하는 것과 같은 팀 이기주의 현상을 말한다. 사일로는 여러 종류의 곡물들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구분하여 저장할 용도로 만든 굴뚝 모양의 창고를 말하는데 그 쓰임새가 부서끼리 담을 쌓는 회사의 모습과 비슷하여 이런 용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사실 많은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혼자만의 성과에 몰두하다 보면 놓치게되는 중요한 것들이 생기고 긴 회사 생활을 위한 탄탄히 기반을 만들기 어렵다. 어쩌면 높은 굴뚝을 쌓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만의 높은 탑을 쌓아올리는 것 같지만 결국 위태롭고도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땐 동전처럼 좁은 시야만이 남게 된다.


첫 이직 때 겪었던 아픈 시행착오 덕분에 두 번째 이직 초반기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꾸려가고 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안되는 이유를 찾기보다 살릴 수 있는 의견을 하나라도 더 보탠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전략보다 함께 일하는 모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한다.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적어도 스스로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이다. 앞일은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기대하고 있다. 혼자만의 창고에 갇히기 보다 여러 생각과 뒤섞어보려는 지금의 노력이 돌연변이 같은 새로운 씨앗을 발아시킬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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