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by 문홍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입학식날 나는 키가 제일 크다는 이유로 제일 뒷줄에 세워졌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깡마르고 청바지와 굵은 털실로 짜인 도톰한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헤어핀을 꽂지 않으면 영락없는 사내아이처럼 보이는 그런 외모였다.


게다가 남자아이들보다 우월하게 큰 키를 우리 부모님은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 집이 다른 집들보다 부유했던 것 같다.


청바지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이도 없었을뿐더러 운동화며 책가방이며 어린 내가 봐도 그렇게 보였다.


제일 뒷줄에 서 계셨던 선생님께서 부모님이 어느 쪽에 계시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부모님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순식간에 주변의 학부모님들의 시선이 우리 부모님 쪽으로 쏠렸다.


그 많고 많은 학생들 중에서 뭔가 나도 특별함을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많은 학생들 틈에 있어보기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뭔가 다른 느낌.




작은 도시 어느 마을의 우리 집.


동네에서는 제일 큰집이었다.


제일 큰 안채에 우리 가족과 할머니가 살았고 바깥채 두 곳은 세들어 사는 다른 가족들이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살았다.


대문에서 한참 뛰어들어가야 나오는 우리 집에는 돼지, 강아지, 닭, 토끼등 다양한 가축들이 함께 살았고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큰 밭에서는 옥수수며 고구마, 고추, 토마토, 오이 등 각종 열매와 채소들이 가득했다. 그곳은 언제나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엄청난 상상력을 키워준 곳이었다.


땅을 조금만 걷어내면 지렁이가 떼 지어 꿈틀거렸고 고추를 만지고 눈을 비비면 눈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철조망 안으로 긴 막대기를 넣어 암탉의 궁둥이를 툭툭 건드리면 암탉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푸드덕 날아올랐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달걀 몇 알이 들어있었다.


간식을 먹다가 남기면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돼지우리에 가서 돼지와 조용히 협상을 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돼지가 비를 맞으며 밥을 먹는 것이 안타까워서 우산을 들고 돼지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서있기도 했다. 마당의 잔디 위에는 항상 넓은 평상이 있었고 여름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그곳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일본에서 유학하셨던 고모님 덕에 냉장고, TV, 밥솥등 그 당시 귀했던 가전제품들이 우리 집에는 있었다.


다이얼식 전화기도 우리 집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동네사람들의 편의도 제공해 주었었다.


저녁밥을 다 먹고 드라마를 하는 시간이 되면 어느샌가 동네 어르신들이 속속 우리 집으로 와서 평상에 자리 잡고 앉으셨다. 아버지는 마당에서도 잘 보이도록 마루입구까지 TV를 꺼내놓으셨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한분, 두 분 마루로 들어오시고 어느새 우리 집은 온 동네 사랑방이 되어있었다.


나는 동네어른들이 챙겨 오시는 간식이 좋았고 어떤 분이든 상관없이 무릎에 앉아 간식을 먹다가 그 무릎을 베고 잠이 들기 일쑤였다.




그런 풍요로운 환경에서 먹을 것은 이웃과 나누고 항상 형편이 어려운 집을 먼저 배려하시는 할머니와 부모님을 보며 넉살 좋은 아이로 거침없이 자랐다.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했을 당시의 우리나라는 끝과 시작의 교집합 안에 속해있었던 매우 혼란스럽고 긴장이 감도는 그런 사회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이했을 무렵은 우리의 조부모님들이 살아온 시대였고,


6.25 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우리의 부모님이 태어나고 살아온 시대였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았던 암흑 같은 시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개발의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밝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 내가 태어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각각의 시대를 거쳐온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그런 시대였다.


각 지방에서도 초가집이 허물어지면서 슬레이트 지붕이 어떤 규격에 맞춘 듯 번듯한 집들이 지어졌다.


버스가 지나가고 나면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 씌우던 비포장 도로들이 아스팔트를 깔아 미끈하게 잘 빠진 도로들로 바뀌어갔다.


위생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면서 전국에 걸쳐 쥐 잡기 운동이 펼쳐졌고 (어떤 마을에서는 쥐 한 마리당 10원씩 쳐주는 곳도 있었다.) 각 읍, 면사무소에서는 쥐덫이나 쥐약을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농사만 지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경제사정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어떤 가정은 아버지가 돈을 벌러 해외로 나가게 되면서 생이별을 하는 가정들도 있었고 어떤 가정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할머니집에 맡겨놓고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그런 가정들도 있었다.


집에서 부업으로 약간의 반찬값이라도 살림에 보태려고 벌었던 주부들이 일자리가 늘어가면서 점점 하루종일 일을 할 수 있는 근무지를 찾아 나섰다.


살림살이도 경제사정도 좋아지는 듯했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들도 사회문제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부모가 돈을 벌러 나가 하루종일 아이들만 있는 가정은 나이에 상관없이 큰 아이의 역할이 막중했다.


동생들 밥을 챙겨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씻기고 재우고 숙제도 함께 봐줘야 하고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도 해줘야 했다. 고아들이 속출했고, 여덟 살이 되면 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아이들이 잘 사는 집에 식모나 애보기로 들어가야 하는 안타까운 사정들이 생겨났다.


아이들을 돈으로 흥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누구 하나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나서는 어른들은 없는 그런 사회였다.


저녁이 돼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이 길에 넘쳐났고 환경적으로 정서적으로 아이들은 사회의 약자에 불과했던 그런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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