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나의 상처와 마주하기까지 또 몇 주가 흘렀다.
겨우 하나 꺼냈는데 앓아누울 만큼 기운이 없고 이유 없이 아팠다.
마음의 표정들.
글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이 표정들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무섭고 아프고 먹먹하지만 감히 그것들을 꺼내서 값싼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으로 둘러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의 어린 마음을 감싸 안기에 나는 이미 세상과 타협하는 편한 방법들에 익숙해져 있었고, 순수하고 귀한 그 어린아이는 이런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내가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 아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이제는 들어줘야 할 때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나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었다.
엄마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했다. (이건 내가 그냥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늘 바쁘게 어디를 다녀오시는지 엄마는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셨다.
나와 동생들이 놀면서 어질러놓은 집안 여기저기를 대충치우시고 저녁밥을 지으셨다.
문제는 집을 치우는 과정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이었다.
엄마가 집으로 귀가하는 순간 마당을 들어서면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세숫대야가 나뒹구는 소리,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듯한 빠른 말투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불똥이 나에게 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번번이 그 바람은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은 점점 커져갔고 특히 동생들과 나를 남겨두고 엄마가 외출하는 날은 불안감이 극도로 커지면서 마당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외출한 날은 동생들과 항상 셋이서 쪽마루에 나란히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내가 동화책을 읽어주고 동요도 들려주고 할머니가 해 주셨던 귀신이야기도 해주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동생들이 춥다고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동생들이 춥다는 말에 방으로 통하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보려고 창고에서 장작이랑 마른 보릿단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보릿단을 꺼내면서 딸려왔던 가지들을 치우지 못한 탓에 불이 그쪽으로 옮겨 붙어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내가 물을 길어다 그 불을 어떻게든 꺼보려고 하던 찰나에 엄가가 들어오 시가다 그 광경을 보았다.
엄마는 핸드백이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물을 부지런히 쏟아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불을 끄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 모으고 있던 나는 다음에 벌어질 어떤 일들을 직감했다.
무모하긴 했지만 동생들이 춥다고 해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인데,
이런 해명조차 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저 매질과 욕설을 하며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살기 가득한 엄마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비는 수밖에 그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매 맞은 데가 아프기도 했지만 뭔지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올라 창고에서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의 무서웠던 눈빛과 모진 말들이 나로 하여금 엄마에게 더욱 매달리게 만들었고,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이 그리워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한 아이로 만들었다.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그러는 게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이런 날은 베개를 흥건히 적실만큼 슬픈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그 당시 당한 매질은 내 뼛속 어딘가 억울하고 쓸쓸한 감정으로 남았을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낮에 동화책에서 봤던 어느 외국의 궁전 같은 집에서 인형들을 갖고 놀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마른 장작들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고 엄마는 동생을 안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깜박 졸고 있었다. 머리를 예쁘게 묶은 내가 강아지와 함께 역할놀이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