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넷 - 착한 아이

by 문홍

하루하루 근심과 한숨으로 희망 없는 날들을 견디고 계시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단 하루만이라도 근심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없을까 생각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동생들도 챙겨야 했다. 당연히 집안 청소도 해야 했고 비가 내리면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도 걷어서 개야 했고 겨울에는 연탄도 갈아야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없었다.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내면의 내가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또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쳐서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이 나를 긴장시켰다.




아홉 살의 나는 '나'를 빼고 '나'로 살아야 했다.


투정도 부릴 수 없고 특히 엄마가 동행하는 학교 행사는 가급적 참석을 안 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매일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해도 뜨기 전에 돈 벌러 나가시는 할머니께 학교의 일은 더더욱 말씀드릴 수 없었다. 가끔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지는 일이 진짜 아파서 그러는 줄 아시는 편이 훨씬 맘이 편했다.


그렇게 집에 우두커니 있는 날에는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고 뭔가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그 말들은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되뇔 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뭔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그냥 우리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는 독후감 사생 대회나 어린이백일장 같은 행사에 참가하면 늘 입상을 하곤 했다.

특히,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노래도 잘 부르고 혼자 상상하거나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점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는 공부도 잘했고 늘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잘해나갔다.


덩달아 아버지와 할머니도 늘 기뻐하셨고 두 분이 웃는 날도 많아지셨다.

비록 형편은 어렵고 엄마의 빈자리도 컸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위해 자투리 나무를 구해서 총이며 칼 같은 남자아이들이 갖고 놀만한 장난감들을 만들어 주셨고 할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가지고 놀던 인형의 옷이며 이불 같은 것들을 손바느질로 조그맣게 만들어 주셨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우리가 집에서 입는 옷들을 재봉틀을 돌려 만들어 입히셨다.


여름에는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전에 커다란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한가득 받아놓고 출근하시면 우리는 점심때가 지나서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서 팬티만 입은 채 물놀이를 하곤 했다. 물놀이하고 나와서 동생들과 나눠먹던 수박 한 조각이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어떤 꿈도 희망도 없이 살지 않았까.



어느 날 친적집에서 연락이 왔다.


나를 며칠 보내라는 연락이었다. 그 집에 큰 딸은 나보다 한 살 위 언니였지만 우린 친 자매처럼 잘 놀았다. 그 집은 우리 집보다 형편도 괜찮았고 친척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나를 무척 이뻐하셨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맛있는 것들로 저녁을 차려주셨고 우리는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 동네 아이들을 금세 모아서 재미있게 놀았다.

친척 아주머니가 찾으러 나오지 않으셨으면 우린 해가 져서도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나니 금세 나른해져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TV소리와 함께 친척 아주머니의 애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분위기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눈만 살짝 떠서 TV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실루엣…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그래도 들리는 말소리는 내 심장을 몹시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서로 알몸인 채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머니는 잘못했다고 빌었고 아저씨는 술에 취해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말을 윽박지르듯이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행..


숨죽여 울기만 하는 아주머니… 무언가로 입을 틀어막은 듯 그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마 처음 있는 일은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두 분이서 하는 이상한 행위들..


나는 또다시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를 낼 수 없어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과 심한 구역감을 느끼며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아침도 거른 채 집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했다. 심하게 부은 두 눈을 보며 언니는 내 손을 잡고 걱정했다. 나는 그때 언니의 눈을 보았다. 그 상황에 남겨져야 하는 불안한 눈빛 같았다.


어제의 일은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시는 두 분이 이상했다. 두 분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고 어제 내가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봤던 분위기와 다를 게 없었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내 머릿속에는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는 아주머니와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무슨 생각에선지 나는 걷다가 문득 아주머니를 쳐다봤고 애써 외면하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잔뜩 오므린 입을 가리켰다. 비밀신호였다.


아주머니는 내가 깨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둘은 설명할 이유도 없이,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이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 남아있어야 하는 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 친척들과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결국 두 분은 이혼하셨고 언니의 행방도 모른 채 내 기억에서도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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