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노브라는 좀 아니지 않나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주류에 들어섰다고 호들갑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채식주의, 폭력에 대한 저항, 정치적 함의 등이 다각도로 분석되면서 한강 소설을 파는 서점들이 갑작스러운 활황을 맞았던 것도 기억한다 (시 분야에서는 김혜순 시인이 국제문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문학이 정말로 세계고전의 수준에 올랐는지 아닌지는 이 글에서 논외로 하고, 우리는 왜 그토록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세계명작 표딱지에 목을 매는 것일까.
아마도 세계명작(주로 서구문학이다)의 주변부로 지내며 우리가 가져왔던 열등감이, 새천년을 맞이하여 국력의 신장과 함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강 작가의 작품 중에서 특히 많이 논의되었던 소설이 '채식주의자'인데 오늘은 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단 소설 '채식주의자'는, 육식이라는, 동물과 인간(육식을 원치 않는 채식주의자를 가리킨다)에 대한 폭력을 고발한다. 여주인공 영혜는 피 흘리는 고깃덩어리에 대한 끔찍한 꿈을 꾼 후 육식을 거부하는데 가족들은 이것을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간주하며 영혜가 억지로 고기를 먹도록 강요한다.
'채식주의자'는 또한 가부장제라는, 여성에 대한 남성 일반의 폭력을 고발한다. 영혜의 아버지는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뺨을 때리며, 영혜의 남편은 그녀를 물건 취급하며 결코 아내를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 역시 그녀의 몸에 그림을 그리며 영혜를 성적대상으로 취급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는 사회의 일반적 통념과 관습 역시 폭력이라 여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혜가 남편의 회사 모임에 나가면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화장도 대충 하고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 말이다. 남편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남들처럼 좀 꾸미고 나가도 되련만, 영혜는 그런 사회적 순응감각이 없어서 노브라로 모임에 참석하는데, 전무의 아내는 그런 영혜를 호기심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 남편도 당황해한다. 물론 여자는 조신하게 옷을 입어야 하고 꾸며야 예의라는 통념은 구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은 노브라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이자 유행으로 여기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회에는 따라야 할 관습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식적 모임에서 노브라에 찬성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형부에게도 성적으로 이용당한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녀는 단지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과 약 복용을 거부하고(자신이 나무라고 여긴다) 거식증으로 말라죽어간다.
사실 아시아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라고 여겨지던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그러나 한강 작가는, 육식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폭력, 가부장제라는 여성을 억누르는 사회관습적 폭력,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정치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 등에 대해 고발함으로써, 재즈, 연애 그리고 청춘의 방황 등을 소재로 존재론적이거나 일상의 가벼운 철학을 펼쳐내던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치고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여기서 한강이 더 뛰어나냐 하루키가 더 뛰어나냐를 가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르고 하루키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문체가 더 마음에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한림원은 한강의 진지한 주제의식과 역사감각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한강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