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중년여성의 사회경제적 소외의 기록
1975년 벨기에 영화 '잔느 딜망'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별로 없는 롱테이크와 단순한 장면 전환 숏들로만 이뤄진 200여분의 실험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잔느는 살림에 쪼들리는 평범한 중년 가정주부이다. 그녀는 남편과는 사별했으며 실비앙이라는 사춘기 아들이 있다.
'잔느 딜망'은 잔느가 낡은 아파트의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다가 벨소리를 듣고 나가 낯선 남자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이 없는 전업주부 잔느는 생활비를 댈 방법이 없어서 아들이 학교 간 사이 몰래 성매매를 하는 것이다.
'잔느 딜망'은 무엇보다도, 잔느가 장을 봐와서 요리를 하고 음식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이불과 옷을 정리하고 빨랫감을 바구니에 넣고 구두를 닦는 등 가사노동하는 모습을 3시간이 넘도록 보여준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매우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샹탈 애커만 감독은 일부러 가사노동 장면을 편집하지 않고 실시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여성의 반복되는 가사노동이 얼마나 고되고 소모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잔느 딜망'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유수의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 영화 랭킹에서 40년간 1위를 하던 '시민 케인'이 2012년 '현기증'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2022년에는 '현기증'이 또다시 '잔느 딜망'에게 1위 자리를 내줌으로써 여성감독의 영화가 세계 최초로 사이트 앤 사운드 1위 영화로 선정된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잔느 딜망'에는 '시민 케인'의 혁신적인 촬영기법이나 '현기증'의 정신분석학적 적용에 버금가는 다른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잔느 딜망'은 소외된 한 중년 전업주부가 안고 있는 실존적 불안을 그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여주인공 잔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상태이며(직업이 없고 남편과 사별했기에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며, 피붙이인 언니 페르낭드는 캐나다로 이민가 있다) 결혼한 전업주부 여성이라면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 될 실존적 불안과 불만족(고된 가사노동, 권태, 사춘기 아들과의 서먹한 관계, 가족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삶의 부재 등)에 시달리는데, 이것이 정점에 이른 것은 원치 않는 낯선 남자와의 성관계였다. 잔느는 모든 삶에 염증을 느낀 듯, 자신을 강간하듯 관계를 가진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이는데 이것은 범죄이기는 하지만 잔느가 비로소 자신의 삶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서려는 의지로도 보인다 (애커만 감독은 잔느가 성관계 중 절정을 느낀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러한 설명이 영화 전체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사족이지만,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세계 1위의 영화가 지나치게 단조로운 외양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실험영화라서 그렇긴 하지만 헐리우드의 화려한 영상에 길들여진 일반 관객이,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별다른 사건이 없이 전개되는 '잔느 딜망'의 지루한 영상을 접하자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촬영기법이 실험적이라고는 하지만 잔느가 관객을 마주 보고 앉아있는 장면이나 길거리를 한참 걸어가는 장면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정면 숏이나 롱테이크에서 이미 자주 보던 것이다), 영화감독의 주관이나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 조금 친절한 영화였어도 좋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