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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아프다 1

문순태 - '생오지 눈사람'을 읽고

by 로즈릴리

‘생오지’는 광주의 무등산과 전남 담양 부근에 근처하고 있는 실제 마을 이름이다.


「생오지 눈사람」에서 두 사람은 9개월 전 자살사이트에서 만난 동년배 가출 청소년이 등장한다.


동수는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치킨 배달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 3학년인 혜진은 주유소에서 알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남과 동시에 감탄사를 뱉으며 거듭 놀란다.

온전하지 않은 가정에 그들의 일터가 한동네에 있다는 것에 놀라고, 나이가 같은 것에 다시 놀라고 두 사람 모두 어둡고 눅눅한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것에 또 놀랐다.


혜진은 알콜 중독자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고, 동수는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와 살고 있는 등 처지가 비슷했다.


내일을 기약할 꿈조차 빛이 바랜 두 사람이었다.

혜진이가 같은 처지의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는 똑같은 흙수저네.”라고 쿡쿡 웃으며 말하자,

동수가 “우리는 흙수저도 아닌 똥수저야.”라고 했고, 그들은 서로를 가리키며 한바탕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이 비슷한 두 젊은이가 자살을 하기 위해 서울에서 되도록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으로 버스를 타고 내려와 생오지 마을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다.


생오지는 무등산 뒷자락 깊은 골짜기 안에 숨어있는 작은 마을이다. 버스도 오지 않고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는다.

9일 전, 동수와 혜진이는 새벽 5시에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 광주행 버스를 탔다. 굳이 행선지를 남쪽으로 택한 것은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이기에, 되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자갈길은 울퉁불퉁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동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선생님이 “지옥으로 가는 길은 반들반들한 포장길이고 천당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 가시밭길이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은 천당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궤적은 이 길보다 훨씬 험했다.


그러나 두 젊은이가 생오지에서 만난 노인들은 난생 처음 자신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인간’으로 배려해주며 따뜻한 정을 나눠 주는 사람들이다.


잠시 극단적인 선택을 미루기로 약속한 두 사람과 노인들이 생오지 공간에서 삶을 일궈가는 과정은 따사로우면서도 눈물겹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 외롭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생오지 공간은 누구든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과의 관계는 따뜻한 정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눈 앞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움트게 했다.


동수와 혜진은 자신들을 반겨주고 처음으로 사람 대접해주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들 역시 소중한 인격체임을 깨닫고 삶의 의욕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 이 소설의 중심서사이다.

그들은 북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으로 올라갔다.

아무데서나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날 때는 자의대로 태어날 수 없었지만 죽을 때만이라도 가장 좋은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고 싶었다.


고층 아파트 옥상이나 호젓한 다리 밑, 외딴 철길, 먼 바다, 고속도로 등도 생각해보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강이 내려다 보이고 숲이 우거진 산이 좋을 듯 싶었다.

남루하고 비루한 삶의 거푸집 같은 육신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면 깊은 산 속이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각기 죽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동수는 죽는다는 것이 조금도 억울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궤적은 울퉁불퉁한 지옥길보다 훨씬 더 험했으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죽어야 할 이유에 대해 수없이 확인했다.


그러나 생오지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공간성은 두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삶의 근원과 본질을 알게 한다.

자신들의 삶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삶의 의욕을 찾게 되는 동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마을 안쪽에서 왁자하게 개들이 짖어댔다. 한 마리가 짖으면 마을의 모든 개들이 따라서 짖어댔다.

동수와 혜진이는 개 짖는 소리와 닭 회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음을 절감했다.


“생오지에 오기를 참 잘했지?” 혜진의 말에 동수는 어둠 속에서 빙긋이 웃으며 생오지에 찾아왔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혜진이가 집 밖에까지 나와 함박 눈을 맞고 기다리고 있다가 동수를 맞았다. 혜진은 머리에 눈을 듬뿍 인 채 언제나처럼 두 팔로 아랫배를 느슨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동수가 보기에 생오지에 온 후로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온 것 같았다.


“추운데 왜 나왔어?”


“누워 있는데 아기가 밖에 나가자고 발길질을 해서 빨리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가 봐.”


혜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동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배롱나무 밑에다 눈 무덤을 만들었어.”


“벚꽃보다 더 아름다워?”


“보고 싶어?”


“응”


“배롱꽃이 필려면 아직 여섯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여섯 달이면 여름이네? 그때쯤이면 우리 아기 백일도 지나서인데… 그래도 배롱꽃을 보고 싶어.”


혜진이가 오랜만에 배롱꽃잎처럼 살포시 웃으며 말하자, 동수가 왼팔로 혜진의 어깨를 힘주어 감싸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눈발이 더욱 굵어지면서 바람이 불었다. 지붕마다 눈이 쌓인 생오지가 거대한 눈무덤으로 보였다.

눈무덤 속에서 생오지 노인들이 큰 소리로 동수의 이름을 외쳐 불러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생오지는 겨울이면 때로는 눈이 많이 와서 교통마저 두절되는 외딴 곳이지만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는 아니지만 따뜻한 정이 흐르고 생명력이 가득한 공간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욕망과 경쟁과 변화를 추구하는 세상과 좀 거리를 둔,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우러진 공간으로서 원시성을 지닌다. 그러나 생오지는 삶이 끝나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희망을 보여주는 ‘포용’과 ‘화해’의 공간이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생명력’의 공간이다.


‘생오지’ 마을이 갖는 생태 공간에서 ‘용서’와 ‘화해’를 생명과 인간의 층위에서 고민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 성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서’와 ‘화해’를 사유하는 지평을 삶에 내재된 인간의 감성에서 과거와의 화해와 현재에 만남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아픔과 화해하는 길은 그 아픔을 내 것으로 품고 견디며 내적 극복을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더 힘겹게 마주함으로써 견디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기억과 먼저 화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고통과의 화해를 신념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포용과 화합을 바탕으로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오지 마을이 갖는 공간성은 여전히 문학적 기억 공간으로서 확장성을 갖는다.

아픔에 대한 기억을 혹은 새로운 삶의 복원으로서의 글쓰기에 해당한다.


문순태 작가의 생오지 눈사람은 삶의 근원과 본질을 종합하고 있다.

삶의 근원이나 본질이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사유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소설에 나타나는 개인들의 생활과 관련하여 우리의 삶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은 단독자이기도 하지만 서로 부대끼며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서 강제된 경계를 다양한 화해의 방법으로 허물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작가의 문학적 접근방법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에서 독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삶의 지혜가 짙게 묻어난다.


현실은 날로 강팍하고 힘든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여전히 서로가 위로하고 포용하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아프다 - 로즈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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