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많은 날
그날은 유독 화가 많은 날이었다
6. 오늘 하루를 다섯 글자로 표현해 주세요
"화가 많은 날."
매번 정기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밀물을 넘어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시기가 있다. 그땐 정말 세상이 나를 등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한 때 '불행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을 듣고 격하게 동의한 적이 있다. 갑자기 신들린 듯이 운이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무조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온몸에 화가 덕지덕지 붙어서 나를 조금씩 갉아먹으며 제 크기를 키워간다. 한 번 붙은 것들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또 어떤 것들은 나도 모르는 새에 아주 오랫동안 머무르기도 한다. 원래도 감정을 숨기거나 표정 관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편인데 오늘처럼 유독 표정 관리가 힘들 때면 차라리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한다. 타인들이 보는 내 모습은 언제나 밝고 안정적인 사람인데, 왜인진 모르지만 그걸 깨버리는 게 싫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그런 사람으로 남기를 바란다.
7. 무슨 날씨 좋아해요?
이너에 재킷을 걸쳤을 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 옷질 하기 좋다. 요즘 봄은 너무 춥고, 가을이 그러기에 딱 적당하다. 길을 걷다가 익숙한 구린내가 날 때 주위를 둘러보면 은행들이 바닥에 진을 치고 있는 것만 빼면 가을은 완벽한 계절이다. 내겐 그렇다. 가을은 가을 타는 것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실 인간은 가을만 타는 게 아니다. 봄도 타고 여름도 타고 겨울도 탄다. 겨울에 비해 다채로운 색들로 채워지는 계절인 봄은 오히려 혹자들에게 위기감을 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봄에 자살률이 제일 높다. 외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자살이라니.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다른 것들에 비교하는 게 너무 심하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라 왈가왈부하진 못 한다. 반대로 겨울은 연말이라는 느낌 때문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고, 여름은 더위를 먹는 사람들이 많고, 가을은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은 모든 계절을 탄다. 하지만 가을은 봄과 겨울처럼 주변과 나를 비교할만한 정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여름처럼 덥지도 않으니, 나에겐 그저 옷질 하며 꾸미기 좋은 계절이다. 특히 가을 특유의 갈색을 좋아한다. 어둡거나 탁하지도 않지만 맑지도 않은 따뜻한 그 색감.
8. 기분이 우울해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어떻게 이겨내나요?
나는 보통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가끔은 우울할 때 하필 알코올이 들어가면 최면을 건 것처럼 술술 털어놓기도 하는데 이 방법이 통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 속에 섞여서 웃고 떠는 동안에도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집으로 향할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가 사랑하는 노래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로 감정적이게 되는데 그럴 땐 아싸리 우울함의 바닥까지 내려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 감정 자체를 온전히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안된다면 다시 밖을 나선다. 처음엔 터벅터벅 걷다가, 있는 힘껏 달려서 심장을 토할 것 같을 때까지 죽어라 달린다. 학창 시절 체육 수행평가할 때도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이 없는데, 그땐 달리고 나서 숨찬 느낌이 너무 싫어서 대충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느낌 때문에 달린다. 그래야 내가 아직은 살아있구나 싶어서 불필요한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결국엔 어떻게든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는 말은 백번이고 맞는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우울하고 힘든 거니까. 어찌 됐건. 그럴 땐 어떻게든 버텨내는 게 가장 확실한 정답이다.
9.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인가요?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잘하는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잘한다기보다 애초에 방법을 몰랐던 거에 가깝지만
나는 '속상하다, 화난다, 슬프다, 행복하다' 이런 표현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게 어려웠다. 말해보려고 해도 그럴 때만 기도가 막힌 것처럼 목이 꽉 막혔다. 이걸 내가 티 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 감정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은 어릴 때 부모가 아이에게 알려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감정보단 부모의 기분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으니 그냥 입 닫고 가만히 있어야지 했다. 가끔은 숨소리조차 내기 싫었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스스로에게도 숨기려 했다. 이 모든 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나를 속였다. 정말 죽은 듯이 살고 싶었다. 인간은 유서에도 거짓말을 한다는데 일기장에 글을 쓰는 것은 유서보다 쉬울 거고, 글 대신 자신에게 던지는 생각들은 더 그러기 쉽다. 감정도 그렇다.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숨긴 것에 나도 속는다. 어쩌면 자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게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내 이야길 꺼내려할 때면, 굳게 먹었던 마음이 하찮아질 정도로 입이 무거워진다. 분명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수도 없이 생각하고 연습했는데 막상 꺼내려하면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마구 뒤엉켜 서서히 백지가 된다.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독증 환자들이 왜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지가 새삼 공감이 된다. 나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고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준 그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씩 연습해야 한다. 그러니 '괜찮아' 보단 '힘들어', '도와줘'라는 말들에 조금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10. 당신은 멈춰 있나요, 나아가고 있나요?
나름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둘러보면 주변이 그대로다. 노력 말곤 뭣도 없는 나 자신이,
가끔은 그조차도 없는 게,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그런 환경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엔 불변이다. 그래서 두렵다. 평생 멈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또 괴롭힌다. 그동안 열심히 움직였던 것들이 다 허상이었으면 어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