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질문 일기 05화

평생을 바라왔던 말이었구나

그건 더 이상 나를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념이었다.

by 이린
21. 위로받을 때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나요?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말과 글이 가진 힘은 위대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괴로움을 덜어주진 못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나는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는 게 아니라 슬픈 사람이 둘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정신적인 부분에선 어느 정도 해소될 순 있다. 그래도 결국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며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일어서서 해결해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전까진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내가 역설적이게도 이따금씩 위로에 기대는 이유는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위함이다.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아주 작은 원동력쯤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때 마음과 생각이 꼬일 대로 꼬이고 뒤틀려서 모든 것들에 염세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내게 소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할지라도, 그들의 진심이 다 보였음에도 나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 손과 걱정으로 가득 찬 눈들을 경멸했다. 겉으론 웃으면서 고맙다고 넘기지만 속에선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냐는 말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역겨웠다.


나의 부모는 틈만 나면 남탓하기 바쁜 사람들이라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뭐든 내 탓을 해왔다. 당신들의 사이가 나쁘고 가정이 이 모양인 것부터 시작해서 길을 걷다가 스스로 발을 헛디딘 것처럼 아주 자잘한 것까지도 모두 내 탓을 해댔다. 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죄로 치부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었던 게 고작 8살 남짓이었다. 그들은 항상 불만을 달고 살며 그 대상이 누구든 나뿐만 아니라 언제든 주변을 탓하기 일쑤였다. 그런 인간들을 보고 자란 나는 매 순간을 자기혐오에 찌들어 살았다. 항상 남 탓을 하는 부모를 닮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남보단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 화살이 얼마나 오랫동안 깊게 살을 파고드는지 알기에 함부로 남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서 나를 몇 번이고 죽였던 그 행위는 화(火)가 되어 온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화가 극에 달했을 때 누군가 잔뜩 눈치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아 또 그 눈이다. 내가 경멸하는 그 눈. 그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끓어대는 화를 참는 게 너무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감히 네가 뭘 안다고?'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 그는 갑자기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절대로. 내가 알고, 네 주변 모두가 알아. 그런데 이걸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은 너야. 넌 잘못한 게 없어. 단 한 개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당최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 악패듯 쏟아졌다. 이게 내가 평생을 바라왔던 말이었구나. 그건 더 이상 나를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념이었다. 작게 떨리는 그의 어깨가, 온몸으로 나를 꽉 움켜쥔 그 품이 왜인지 버겁지 않았다. 그 정도로 세게 안으면 숨이 막혀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그 숨 막힘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처음으로 느껴 본 위로란 그러했다. 그래서 내가 힘든 순간에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22. 당신이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안정, 평안, 행복.


을 얻을 수 있는 부(富).


가난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어떨 땐 마음조차 가난하게 만들어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돈으로 살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게 있다면 정말 돈이 충분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이것이 참된 세상의 이치다. 어릴 적부터 가난을 달고 살아서 돈의 역할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건지는 진작 알았지만 그럼에도 돈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겠거니 했다. 사실 이미 정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애써 합리화하고 자기 위안 삼으며 도망친 것밖엔 핑계 댈 말이 없다. 가난은 사람으로부터 모든 여유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피곤하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피곤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은 무엇 일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오고 있지만 돈이 없다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막대한 부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돈이 있어야 행복을 위해 무언가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자기 계발이나 취미활동도 웬만하면 돈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도,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는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돈 없이 굴러가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그래서 가난은 여러모로, 사람을 병들게 한다.



23. 당신이 남들한테 하는 '척'은 무엇인가요?


굳이 의도한 바는 없었지만 타인들이 바라보는 나는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 그래서 '항상 밝은 사람'이다. 부모로부터 근본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 보일 수 있는지가 여전히 의문이다. 언니가 주는 사랑의 영향이었는지 또는 친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사랑 덕분인 건지, 아님 그동안 스쳐갔던 수많은 이성들이 성장통으로서의 역할을 너무 잘해준 덕인지 모르겠다. 이 정도의 조건만 갖추어도 그런 사람으로 비칠 수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나의 모습은 '척'이었을 수도 있겠다. 진심 하나 없는 연기를 하진 않았더라도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도는 했던 것 같다. 무의식 속에서도 나름 의식적으로 골라냈던 매 순간의 작은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어찌 됐건. 내 노력이 닿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겠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내게 사랑을 준다. 그것도 과분하게.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맞다. 그럼에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나를 숙주 삼아 기생하다 잊을만할 때쯤 다시 나타나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동안 소중하게 모아 온 당신들의 사랑을 너덜너덜해지도록 덧붙였는데도 정작 메워져야 할 구멍은 여전히 구멍인 것 같다.



24. 힘든 걸 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제 와 새삼 느끼는 거지만 생각보다 대답하기가 꺼려지는 질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스스로의 깊은 내면을 곧바로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랬다. 내가 고이 접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던져둔 것들, 마치 앞으로도 절대 꺼내보지 않겠다 다짐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골라서 끄집어내는 느낌이다. '나'의 결핍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불안정한 행동 양상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내게 '힘들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감정이 아니다. 그리 대수도 아니고. 남들 다 힘든 건 똑같은데 그 속에 섞인 마당에 내가 뭣하러 티를 내나 싶다. 어차피 해결이 안 된다. 사실 참는 게 제일 쉽다. 버릇이 잘못 들었다. 나도 안다. 근데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생겨먹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나 혼자 아프면 그만이지 굳이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까지 이 아픔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창피하니까. 창피하면서도 속상하고 좌절스럽고 허무한 이 더러운 감정을 그들은 평생 몰랐으면 한다. 나와 아주 오래전부터 연이 닿은 만큼 가깝거나 알고 지낸 기간과는 무관하게 유대감이 몹시 깊은 몇몇의 사람들은 나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젠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나서도 후련한 건 모르겠다. 괜히 말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내가 나누고자 덜어놓은 몇 마디들이 그들에겐 짐이 될 것 같다는 걱정을 한다. 가뜩이나 본인 하나 건사하기 힘들 만큼 여유가 부족한 세상인데 누군가의 유한한 여유를 내가 빼앗아 간 느낌이다. 나한텐 이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식인 것 같다.


나는 이게 사랑인가 보다.



25. 이상형은 어떤 사람인가요?


올바른 경제관념을 가지고 어느 정도 현실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 겸손함이 몸에 배어있고 차분하며 예의 있는 사람. 의지력과 현명함, 행동력이 있는 사람. 자신의 감정에 대해 차분히 말로 설명하고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 다투게 되는 경우 회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서로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게으르지 않고 배울 점이 있으며 나에게 긍정적인 동기부여 또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한결같은 사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연인에게 자존심이나 승부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 말보단 행동으로 믿음과 확신을 주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나의 겉모습이 아닌 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나한테 미쳐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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