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말이 쉴 틈 없이 떠올라서 입에 한가득 머금다가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낼 때가 있었다. 쉽게 뱉었지만 결코 가볍진 않았던 그 말이 문득 어려워질 때면 나는 이 관계의 끝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감내해야 할 아픔들에 흐린 눈을 했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잃어 다친 마음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어갔던 연애들은 으레 건강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내면서 나를 나로 채우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표현을 아끼고 오히려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를 임의로 제한해 버렸다. 딱 이만큼만 좋아하자. 너보단 내가 너를 덜 좋아하고 나중에 네가 곁에 없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만큼만 좋아하자.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나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을 만큼 멍청했다. 상대는 물론 나 자신까지 다치게 만들었던 이유가 그렇게 하찮은 두려움이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 또 한편으론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하는 것에 잔뜩 겁을 먹었던 몇 년 전의 내가 안쓰럽다. 연애 초반에는 상대의 마음을 믿지 못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에 철없이 예의가 없었고, 후반에는 이 관계가 곧 끝날 거라는 예감에 스스로의 마음에 예의가 없어서 나를 보호했다. 결국엔 둘 다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방어기제였다. 겁이 많은 사람은 놓치는 게 많아진다는 걸 이미 소중한 것들을 다 잃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이걸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적어도 나 때문에 다치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
17. 좋아하는 단어 있어요?
나는 따뜻하고 편안한 안정감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분위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단어라면 뭐든 마음에 담고 싶다. 사랑, 애정, 윤슬, 파도, 일몰과 같은 말들을 좋아한다. 특히 사랑이란 단어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노래 가사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을 동요시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신에게도,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을 말하고 싶다.
18. 나는 어떤 색인가요?
많은 색들이 겹겹이 쌓여 탁해졌음에도 새까매지진 않은 색. 끝내 검은색이 되지 않으려 아득바득했던, 무수한 노력들이 담겨있는 색이 가장 걸맞은 표현이다. 지금보다 성숙하지 못했을 땐 내가 알록달록하지 않음이 창피했고 화려한 색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물론 지금은 아예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나의 색을 숨기고 싶어 하진 않는다. 스스로 못나 보이고 안쓰러워 보였던 부분들이 누군가에겐 따뜻해 보이고 대견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나는 다양한 색들을 담고 있어서 내 마음대로 꺼내 보일 수 있는 색들이 더 많고, 어두움보단 따뜻함에 가까운 색감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회색'이다.
19.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난다면 무엇일 것 같나요?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버텨낸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에 의해 적당히 희석되고 둔해진다. 당시엔 엄청 속상하거나 화났던 일들이 이제와선 아무렇지 않듯이 대개의 감정들은 무뎌진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러지 못한 과거들이 있고 기억들이 남아있다. 아주 가끔씩 숨을 가쁘게 만드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조금은 두렵다. 나름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잘 지나오고 있다 생각했는데 혹여나 아직도, 여전히 나는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는 건 아닌지.
매일 지나가는 하루가 앞으로 조금씩 더 안정해진다면 나한텐 그것도 기적일지 모른다. 언젠가 '아 내가 그런 걱정을 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괴로워했구나' 하면서 별거 아닌 것들이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기적이라고 하겠다.
20. 오늘 당신의 곁엔 누가 있었나요?
나와 피가 섞인 사람 중 내가 유일하게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 평생을 걱정과 불안으로 살아가는 내가 잠시나마 안정과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할 수 있는 관계이며 내겐 죽어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다음 생엔 내 엄마로 태어나줬으면 좋겠다 언니. 아니면 언니가 내 딸로 태어나는 게 더 좋겠다. 그래야 내가 더 많이 사랑하지. 우리 다음 생에서는 꼭 서로의 딸과 엄마로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사랑하고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