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식토끼 Aug 15. 2024

로터리섬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흑과 백으로만 이뤄진 풍경 속에서 자동차들은 I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I가 있는 곳이 로터리였고 자동차들은 그 주위를 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I는 커다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멀찍이 떨어진 교통섬을 로터리섬이라고 불렀다. 지름이 약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원형 로터리섬은 다른 교통섬들이 으레 그렇듯 짧은 잔디로 뒤덮여 있었다. 그 로터리섬에 서 있는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곳에서 I는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아챘다 해도 특별히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저 아무도 없는 로터리섬에 동그마니 서서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뿐.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나면 어느새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곤 했다. 



I는 꿈이 좋았다. 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았다. 허무맹랑한 일들이 터져도 ‘헉, 꿈이었구나’ 하는 대사만 붙이면 그것이 바로 개연성이었다. 꿈이라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스스럼없이 했고,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곤 했다. 



꿈은 독서나 놀이기구보다 훌륭한 간접 체험이었다. 원하는 내용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온갖 모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은 가장 혼란했다. 방금까지의 경험을 만능세제처럼 삶에서 슥슥 지워버리곤 했다. I는 분명 하늘을 걸었고, 굴러 떨어지기도 했으며 처음 보는 친구들과 모험을 떠났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건 얄팍한 기억력뿐이었다. 그마저도 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 일쑤이고 강렬했던 감각의 뒷맛만 손에 얼얼하게 남아 있곤 했다.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된다니. 내가 겪었던 일은 어떻게 된 걸까? 애시당초 ‘내’가 겪었던 일은 맞나. I는 늘 궁금했다. 



물론 좋은 꿈만 꾸는 것은 아니었다. 절반 이상은 기이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가장 평범하게 무서운 꿈이라면 ‘어떤 존재’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대책 없이 쫓길 때면 한 번쯤은 용감하게 맞서보고 싶기도 했는데 꿈에서는 매번 숨고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무서운 꿈보다도 오래 몸에 남는 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가 여러 번 꿈에 나올 때였다. 그럴 때면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 몸 전체를 훑었다. 지금처럼 로터리섬에 서 있는 꿈을 꾸고 나면 평소보다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바뀌는 것은 없었다. 평소처럼 아침밥을 먹고, 이를 닦고, 내리막길과 공룡 바위를 지나 학교에 갔다. 친구들과 놀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붕 뜬 느낌이 가라앉고는 했지만 가끔은 하굣길에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몸에 영혼이 대충 걸려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가느다란 보도블럭 옆에 달리는 차들을 보다 보면 이곳이 꿈처럼 느껴졌다. I는 이 기시감이 뭘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등굣길마다 하얀 승용차로 데려다주는 아빠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꿈보다 모호했다. 그럴 때마다 I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오므라들듯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만져 보았다. 



나는, 정말로, 여기, 있는 게 맞겠지?



I는 여전히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너머로 조용한 도시가 보였다. 도로 하나만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로터리섬은 꿈에서도, I가 깨어난 세상에서도 가장 정적인 공간이었다. 원하는 만큼 혼자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종종 철새처럼 로터리섬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횡단보도도 없는 이 섬에 어떻게 왔을까 싶었지만 꿈이라서 상관없었다. 그들은 작은 로터리섬을 휘 돌다 가끔 본인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내 안부를 묻고는 왔을 때처럼 기묘하게 사라졌다.



무엇으로 I가 서 있는 이 로터리의 세계가 꿈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로터리섬에 방문한 그들이 증명해 줄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려나. 다치거나 빨간 피를 보면 그곳이 현실일까? 아니, 꿈에서도 다치거나 아플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아픈 방식으로 더 많이 다치기도 했다.



I는 천천히 로터리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양손으로 살며시 안아 몸을 웅크렸다. 까끌까끌한 잔디의 감촉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내가 원래 머리를 풀고 다녔던가. 상관없다. 머리를 풀든 묶든, 세상이 흑백이든 컬러든 I는 나니까. 



I는 자동차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도로를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저 흰 승용차는 꿈에서 보던 아빠 자동차가 비슷하게 생겼네…. I는 하품을 하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스스로가 오래도록 낯설게 느껴졌던 감각을 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전 05화 이름 짓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