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프로젝트#4
내 나이대 사람이라면 저장하지 않아 경험하는 작은 실패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업무 중 저장하지 않아 프로젝트 관련 파일이 날아가 버리는 상황이다. 머리를 쥐어짜며 자료를 제작하다 보면 순간의 아이디어나, 다양한 복기, 첨삭 등으로 자료는 점점 완성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오류로 그 고생이 날아간다면, 돈으로도 못사는 내 집중력과 순간의 번뜩임은 무(無)로 돌아간다.
물론 이를 적극 공감하는 작업 프로그램 회사들은 자동 저장 기능들로 어느 정도는 구제해 준다. 하지만, 찰나의 저장을 하지 않음으로 길게는 2시간 짧게는 30분의 기록이 날아간다는 것은 끔찍하다. '오 오늘 아이디어 좀 나오는데?'라는 자뻑 같은 것들은 증명할 수 없는 한심한 소리로 변하기에 말이다. 나도 그 한심하고 안타깝고 무(無)로 돌아간 일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저장 하지않아서'는 오랜만에 간 도서관에서 발생했다. 최근 나는 와이프와 함께 주말마다 독서나 글쓰기를 목적으로 조용한 카페를 찾아다닌다. 그날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동네 도서관을 가보기로 했다. 대학 문예창작학도 시절, 단편 독서 과제를 위해 밥 먹듯 찾던 김포 중봉도서관 이후 10년 만의 방문이다. 특히나 도서관 열람권을 발급받아 열람실에 들어가는 것은 고등학생 이후 처음 같다.
도착한 도서관에는 온갖 사람이 가득했다. 단순하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다양한 사람이 독서나 공부 등을 하고 있었다. 주위를 더 살펴보니 무수한 각자만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보였다. 명품 비니를 쓰고 부동산 중개업을 공부하는 50대 중년 아저씨, 분명 성인 같은데 고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공부하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젊은이, 분명 집 책상이 분명 화려할 것 같은 데스크테리언 등 제각각의 목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어 보였다.
그렇게 나도 하나의 목적이 있어 집중하고픈 사람이 되고자 독서를 시작했다. 요즘 에세이를 즐겨보는 데, 참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영감을 주어 좋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언가를 향유하는 게 난 즐겁다. 아무튼 그렇게 한 시간쯤 독서했을까? 번뜩 써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바로 평소 사용하는 메모 위젯을 실행해 신나게 글을 썼다. 그날의 초고는 지난 3일 올린 '9일간의 휴식' 글의 아이데이션이었다. 9일간 휴식을 하면서 느낀 그 말랑한 영감을 신나게 스마트폰으로 써보고 있었다. 마치 누가 보면 '쟤는 도서관 와서 스마트폰만 하고 있네'란 소리를 듣기 딱 좋게 폰을 뚫어져라 보며 집중한 상태로 글을 썼다.
특히 그날은 나름 체계적으로 기승전결도 만들어 에세이 속 목차를 만들어보고, 느낀 점들이 확장해나아가는 구조로 작성해 스스로 뿌듯했다. 매번 발행일이 다가오면 프리스타일로 글을 쓰는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J 같은 계획적 면모랄까.
꼭 사건은 그런 때 발생한다. 글을 쓰던 중 특정 단어가 맞춤법이 맞는지 문득 궁금했다. 평소 스마트폰을 사용하던 버릇처럼 홈 버튼을 눌러 검색엔진에 그 단어를 검색했다. 그 뜻과 맞춤법을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아뿔싸. 글이 없다. 아이데이션 치고는 길게 1,000자는 족히 썼다. 근데 글이 없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집중력이 정말 돈으로 살 수 없게 날아가 버렸다. ‘제가 정말 엄청난 글을 썼다니까요?’를 아무도 믿을 수 없게끔 페이지는 말끔했다.
알고 봤더니 메모장 위젯은 꼭 하단 '완료' 버튼을 눌러야 저장이 된다. 보통 앱 사용하던 기록은 백그라운드에 남아 다시금 불러올 수 있지만, 위젯의 특성상 그냥 사라져 버린 거다. 사실 어렴풋 '완료' 버튼이 필수란걸 알고는 있었다. 심지어 이 경험은 작게 몇 번 해봤다. 그땐 그리 뒷골이 시큰하지 않았나 보다.
나의 현실 부정이 시작됐다. 온갖 곳을 뒤지며 그 자료를 살려낼 방법을 구글링했다. pc로 연결해 로그를 다운받으라는 둥, 메모 앱 PC 버전 고객센터를 이용하라는 둥, 팁이라고 해서 클릭했더니 포기하란 글을 써둔 어처구니없는 블로그까지 모두 찾아봤다.
그렇게 현실 부정에 10분 가량 사용했을까? 내 머릿속에서도 날아가기 전에 다시 쓰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때는 메모 앱을 직접 실행해 다시금 작성했다. 찰나의 그 영감들을 어떻게든 떠올리고 싶었다. 시쳇말로 내 기준 ‘개쩌는 그 글’을 살려내고 싶었다. 퍼즐 다 맞춰뒀더니 누군가 한 상 뒤집어버려 다시 시작된 퍼즐 같았다. 그래도 '9일간의 휴식'이라는 제목은 남아 있었기에 그것을 중심으로 뭉텅뭉텅 머릿속에 떠도는 기억을 기워 붙였다
그 잇고 덧대는 작업 중 나는 계속 과거의 나를 탓했다.
‘아 완료 버튼 누를걸’ ‘아 알고 있었는데 왜 안 눌렀을까?’ ‘아 안일한 녀석’
어쩌겠는가 아무튼 그렇게 글의 조각 모음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보다 있던것을 다시금 똑같은 것으로 떠올리는 난이도는 높았다. 그렇게 글은 완성됐다. 체감상으로 첫 글과는 70% 유사한 것 같지만 글 자체는 마음에 든다. 다만, 옅게 머릿속에 맴돌 뿐이다.
‘그 전 글은 더 좋았을까?' ‘나는 첫 글 마무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