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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 하지않아서2

에세이 프로젝트#5

by 단단지

요즘 '저장하지 않아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또 나다.


이번 '저장하지 않아서' 두 번째 이야기는 앞선 사건과 결이 조금은 다르다. 지난 글에서는 그날의 에피소드를 나열했다면, 오늘은 나의 안일함에 대해서다.


최근 '더 위쳐3'라는 게임을 즐기고 있다. 짧게 설명하자면 소설 '반지의 제왕'의 폴란드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소설을 게임화한 세 번째 작품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폴란드 방문 당시 총리가 이례적으로 이 게임 시리즈를 선물했다는 게 이 게임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아무튼 2015년에 나온 이 게임을 여차저차한 이유로 10년 만에 플레이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 게임은 다소 옛날 게임이다 보니 요즘같이 자동으로 저장되는 기능이 별로다. 큰 에피소드가 마무리되지 않는 이상 자동 저장이 안 된다. 만약 특별한 에피소드를 만나지 않고 한참을 플레이하다가 별안간 캐릭터가 죽으면 다시금 굵직했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요즘 피피티나 워드도 몇 분 단위로 로그를 저장해서 자료 날아가는 것을 방지해주는 데 10년 전 구닥다리(?) 게임이라 그런지 참 저장을 안 해준다. 지난 글에서 노션 위젯 사용 시 '완료' 버튼을 안눌러 창작물을 날려버린 사연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종류의 '저장하지 않아서'다. 노션은 '완료'를 누름으로써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더 위쳐3'에서는 수시로 저장을 해줘야 한다. 마치, 엑셀과 파워포인트, 포토샵 등에서 틈만 나면 저장해야 하는 모양새*와 같다. (*물론, 요즘 MS오피스는 자동 저장이 아주 자주 된다)


문제는 내 안일함이다. 게임을 하다 보면 '저장해야지'가 인지되는 순간이 많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이유는 별것도 아니다. '별일이 안 일어날 것 같음', '저 몬스터는 저장 안 해도 이길 수 있음' 등의 이유다.


캐릭터가 죽는 상황은 대부분 이렇다. 첫 번째는 이렇다. 난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먼 길을 말 타고 달려가는 중이다. 먼 길을 가다 보니 다양한 지형지물을 지나간다. 당연히 나는 무난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기에 당연히 저장을 안 한다.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저장을 안 하고 열심히 게임 속 몇 리를 달린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새로운 장소를 지나다 보면 지도에 물음표가 떡하니 있다. 그럼 나는 심부름 간 어린이가 문방구에 정신 팔리듯 그 물음표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안 따라갈 이유가 어디 있나? 당연히 게임 속 세상은 호기심천국이다. 그 호기심을 풀라고 만들어진 것이 게임이다. 응당 따라가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호기심을 따라 그 장소에 도착하면 여기 있을 리 없는 샛빨간 이름**을 만나 순식간에 한 대 얻어맞고 돌연사해 버린다. 그러곤 과거의 과거, 약 30분 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보통 게임에서는 나보다 강력한 몬스터들의 이름은 진한 빨간색이다.. 만만하면 흰색, 쉬운 상대면 초록색 등으로 표시되곤 한다.)


사실 이 상황에서 대처법은 간단하다. 물음표를 발견하면, 혹은 저 멀리 샛빨간 이름이 보인다면 반사적으로 저장부터 하면된다. 그러나 안일하게도 난 단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불나방처럼 불로 달려든다. 어려움 난이도라는 것을 새까맣게 잊은 채.


그럼에도 핑계를 대자면 예상치 못한 강력한 몬스터와 조우했기에 마치 교통사고와 같다고 본다. 정말 그렇다. 천재지변처럼 나타난 몬스터를 어찌 피하겠는 가?, 내 잘못은 없다***. 그냥 운이 없었던 게지. (*** 갑자기 구덩이에 빠져 낙사하기도 한다. 정말 교통사고다)


하지만 두 번째를 듣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다음 사례도 흔하게 일어나는데 정말 안일함 그 자체다. 두 번째 상황이다. 게임을 하다 보면 몇 마리는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약한 몬스터 녀석들이 있다. 특히나 이 녀석들은 언제 어디서나 서식하고 있고 흔하디흔하게 만날 수 있어서 친근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죽음은 안일함과 함께 찾아온다. 여느 때처럼 대륙을 여행하다가 작은 보물 상자를 발견했다. 여기서도 응당 게이머라면 그 보물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그곳에 잔바리 친구들이 있다면 안 갈 이유는 더욱 없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란 진리는 어김없이 작용한다. 3마리였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불어난다.


특정 몬스터는 울음소리로 지속해서 동족을 불러낸다. 울음소리를 내는 몬스터를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데 여러 마리 몬스터가 달려들어 공격 타이밍을 뺏기다 보면 몬스터가 늘어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내 체력 게이지는 점점 줄어들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다시 과거의 과거의 과거로 돌아간다.


당연히 해치울 수 있다고 자만하고 달려들어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다. 사실 두 사례에서 그냥 무지성으로 무슨일이 생긴다 싶으면 저장을 해버리면 된다. 그런데 참 상황, 상황마다의 나는 안일함으로 인해 저장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 사례 외에도 지나가다 버튼을 잘못 눌러 마을사람을 때렸더니 몰려온 경비병에게 몰매 맞고 죽거나, 잠수한 상태에서 길을 못찾아 숨이 막혀 죽거나, 메인 스토리에서 원하지 않는 선택지를 눌러버려 한 참 이전으로 눈물을 머금고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경우 등 안일하게 '저장하지 않아서' 과거로 돌아가는 경우는 다양하다. 사실 그러려니하기도 하지만, 정말 다시하기 싫은 구간이나 먼 길을 지루하게 가야할 때는 '저장하지 않아서'의 후회가 몰려온다.


아무튼 다시 한번 또, 다시 '오늘은 안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이 글을 쓰는 토요일 새벽, 와이프는 피곤하다며 잠들었다. 판타지 세상으로 출발할 시간이다. 오늘은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겨도 5분마다 수동 저장을 하리라. 아니 뭔가 낌새가 보이면 저장부터 할 테다. 오늘 밤에는 '저장하지 않아서' 고통받지 않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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