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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Jun 02. 2016

니체의 인생 강의

실존에 대한 의문은 생존의 본능이다.

왜 사는 걸까?

열심히 사는데 아주 가끔, 그것보다는 조금 더 가끔은 인생이 허무할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서 헉헉 거리면서 사는 거지, 왜 사는 걸까 등과 같이 나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실존적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물론 나는,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철학에 대해 무관심하며, 그것은 대학 진학, 취업과 무관하기 때문에 가르칠 수가 없다. 이유야 많지만, 철학이라고 부를만한 교과시간을 확보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고, 현재 교육과정에 성교육, 독도교육, 생명존중(자살예방) 교육, 인권교육, 장애이해교육 등과 같은 범교과 교육 시수 확보와 행사시간 확보만으로도 기본 교육과정 운영이 잔인할 만큼 벅찬 것이 현실이다. 철학이라는 교과는 없지만, 도덕과 윤리라 하는 교과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철학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이란 인간 실존에 대한 의심-"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데, 도덕과 윤리는 그 의심을 사전 봉쇄하는 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철학을 배우지는 않았음에도, 철학적 사유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을 배운 철학자는 아니지만, 실존의 의미를 던지며 살기에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니체에 의해서 삶을 배웠으며, 니체처럼 살고자 하는 철학자, 이진우 교수는 우리가 자신의 존재와 생에 대해 의문을 품고 실존적 의심을 하는 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살고 싶어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왜"라는 의심을 하고 있다는 거다.

그 생존에 대한 본능의 이유를 이진우 교수, <니체의 인생 강의>를 통해 잠시나마 엿보고자 한다.


❖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를, 나는 신을 믿지만 좋아한다.

나는 태생적 기독교인이다. 모태신앙인. 그럼에도 나는 니체를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글 쓰는 사람을 거의 믿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이란 그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쓰는 그 글은 그 사람의 느낌과 생각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리고 그릇은 글을 쓰는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 그릇을 크게 만들거나 예쁘게 만들어서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건, 그가 쓴 글일까? 그일까?) 우리는 그 그릇의 위용에 현혹되어 그 사람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글로써 그 사람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글로써 자신을 포장할 수도 있다. 그러니 글이 좋다고 그 사람마저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끝끝내 도박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지 않은가.

그러니 철학을 한다고 그 사람이 나보다 인생을 잘 산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철학자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철학은 사상이 아니라 삶이었기 때문이다.


삶이 사상이고 사상이 삶인 철학자 p. 19
 

니체는 기독교적인 도덕과 가치를 전면으로 부정한다. 그랬던 그가 인간도 아닌 동물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1889년 겨울날, 그는 창문 밖으로 한 마부가 채찍으로 말을 때리는 것을 본다. 그 장면을 본 니케는 맨발로 뛰어 내려가 말을 가로막고, 광기의 발작을 일으킨다.

어릴부터 천재였던 그는 학위가 없었지만, 1869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교수가 된다. 그러나 10년 뒤 교수직에서 물어나 여행을 다니며 많은 책을 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 고통 속에서도, 그는 글을 쓴다. 그러던 그가 1889년에 광기의 발작을 일으키고서는 두통에, 위통에 그리고 시력 저하로 침실에서 누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1900년에 영면한다.

니체는 광기의 발작을 일으키기 전부터 아주 몸이 안 좋았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 사유했다는 것이다. 삶과 존재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유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반항하는 본능적 이유로 실존의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가슴으로 철학을 느꼈던 것이고, 그의 철학은 사상이 아니라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가정을 하면, 청춘 시절 아파본 적이 없음에도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는 사람의 글-사람에 대해서는 모르고, 글이 참 좋았다.-보단 실제로 아파본 사람이 소주 한잔 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이다. 비록 정리되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 사람의 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용인할 수 있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죽음이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철저하게 사유하는 사상은 어떤 성격일까? 그냥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만들어가는 사랑이 아니라 몸으로부터 나오는 사상을 전개한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p. 25


유명한 명언을 외우거나, 철학자의 사상을 인용하면서 삶은 전혀 명언과 사상에 가깝지 않은 사람은 비록 세상의 주인공일지는 몰라도 인생의 주인공을 될 수 없다. 우리는 니체처럼 삶이 철학이 되는 사람이 되어햐 하지는 않을까.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신의 죽음을 설파하는 니체를, 그래서 나는 신을 믿지만 좋아한다.


❖ 허무에서 발견하는 불쏘시개, 아모르파티(amor fati:운명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열심히 살고 있지만, 허무할 때가 있다. 누구나 그렇다. 돈 많고, 잘생기고 이쁜 언니 오빠들도 그렇다. 손예진, 김태희인들 안 그러겠는가. "왜"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존의 본능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허무할까. 더군다나 그 허무가 왜 일상이 되어버렸는가.


허무주의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면, 니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 왜 사는지 대답할 수 없다면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산다고 미소 지으며 대답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제까지 최고로 여겼던 가치가 사라지는 것, 모든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 바로 허무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p. 47


그렇다면 허무주의가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삶에서 무엇이 결여되었는가?

바로 니체의 선물, "신의 죽음"이다.

신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우리의 목표는 차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안에 있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렵고 억울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문명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신화의 시대로 시작하여, 철학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로 넘어왔다. 19세기, 과학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다윈의 등장으로 마구 흔들렸다. 그때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삶의 목표가 피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은 목표의 상실이었고, 그것은 허무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니체는 그렇게 신의 죽음을 설파했고, 그 죽음으로 인해서 허무의 일상마저도 예견하였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니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지금"을 살지 않고, "저곳에서 나중"을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살아 숨 쉬는 "이곳과 지금"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죽고 난 뒤의 "나중과 그곳"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에, 정작 살아 숨 쉬지만 죽은 것과 같고, 살아있지만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삶의 주인이 되라고, 운명의 주인이 되라고, 신을 죽음은 선포했다고,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는 것이 아니다. 허무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설파했다는 거다.

신이 없다. 이때까지 신을 바라보고 살았다. 그러니 신이 사라지고, 살아갈 목표가 사라졌다. 그래서 허무하다. 니체는 이 허무를 인정하고, 이제는 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신의 탓을 하지 말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운명의 주인이 되라고,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하며, 그런 마음가짐을,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애)라고 말했다. 


왜 사는 걸까,라고 허무에 빠지지 말고, 생존에 더 강한 본능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을 사랑하여 더 뜨겁게 인생을 살아보자. 비록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나의 신은 여전히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나는 그럼에도 니체를 좋아한다. 어쩌면 이진우 교수가 말해준 그를.

그리고 언젠가는 니체의 입문서가 아닌 니체의 책을 읽을 거라고 희망한다.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 보다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 사귀며 웃고 떠드는 것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나는 니체주의자는 못된다. 나는 앎이 깨달음으로 행함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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