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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 May 08. 2020

할아버지와 연둣빛

나의 할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깔끔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셨다.


하루종일 주방에 서서 무언가를 하는 젊은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거나

거실에 놓인 인형을 친구삼아 안고 뒹굴거리면

밥짓는 냄새와 함께 어스름해지는 저녁이 되고

양복입은 할아버지가 퇴근을 한다.


내가 하루종일 기다린 시간.

할아버지 퇴근시간.


가끔 손에 까만 봉지가 들려있으면 모양이 제각각인 센베이 과자가 틀림없다.

그 중 나는 가운데 김이 살짝 뿌려진 부채꼴모양의 과자를 제일 좋아했다.

봉지가 없어도 한번씩 내 입에 엄마랑 할머니 몰래 숨겨오신 간식거리를 넣어주신것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과자봉지가 손에 없어도 사실 상관없었다.

어렸지만, 나는 할아버지를 과자보다 더 좋아했으니까.


할아버지는

정갈한 미색의 저고리에 연둣빛 배자로 갈아입고

무릎에 나를 앉히셨다. 


그러고선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나를 바라보던 온화한 눈빛은 선명한데

그 음성은 너무 희미해서 늘 아쉽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첫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기억인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각자 자신의 첫기억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그 강연의 끝에서

나는 이 장면을 떠올렸다.


한 장의 사진처럼 저장된 나의 첫 핵심기억.

따뜻하고 포근했던 할아버지의 품, 할아버지의 무릎, 할아버지의 냄새, 할아버지의 눈빛.


그로부터 몇 년 후 약 1년 간 투병생활을 하시고는

내곁을 떠나셨다.


그때는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그저 그 따뜻한 품이 더이상 내차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 무릎은, 그 기억은, 내 동생들은 아무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죽음이란 것이구나. 했을 뿐.




가끔 할아버지가 그립지만,

내 가슴 속 어딘가에서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아직도 훈훈한 온기를 간직한채 살아있어

행복하고

따뜻하고

고맙다.


봄 새싹의 연둣빛을 보며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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