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소통'으로서 '언어'를 주목하고, 파고드는 '사적의 군상극'
*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원작이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중편 소설은 하루키가 일찌감치 구축한 노선을 좀 더 처연하게 풀어내는 작품이었다. 모두 배우의 길을 걸었던 중년 부부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고, 이후 홀로 남은 남편은 점점 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자 자신의 낡은 수동 세단을 운전할 사람을 찾다 젊은 여성을 고용하게 된다. 평소라면 만날 일도, 대화할 일도 없었을 둘은 차츰 운전 중에 이야기를 하며 서로가 가진 비밀과 마음의 상처를 인식하게 된다. 그 비밀은 때로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문제도 있고, 동시에 사람이 가진 어두운 이면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지나간지 오래다. 둘은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지만, 동시에 과거에 완전히 파묻히는 대신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길을 택하려 한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루키가 풀 수 있는 진득한 심리와 다시 거기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해도 다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조망하는 작품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소설의 두 주인공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과 배경, 그리고 드라이브를 통해서 이뤄지는 교감이라는 큰 얼개만을 가져온 채 모든 부분을 재구축한다. 물론 그 모습 또한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해피아워>와 <아사코>, 그리고 그가 각본으로 참여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서 드러냈던 것처럼 사적 에세이일 것 같은 흐름은 어느 순간 군상 속에 뒤섞이고, 시퀀스의 긴 여백과 사이의 공백을 통해 등장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며, 의도적으로 연극적인 연출을 인용하거나 연극 그 자체를 활용하는 연출도 어느 정도 반복된다.
그러나 하마구치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자신이 즐겨 써왔던 요소를 반복하는 동시에, 더욱 심화시키고 한 걸음 더 걸어 나가며 자신만의 메소드를 더욱 깊게 퍼트려나간다. 가장 강하게 두드러지는 부분은 '언어'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중견 연극 배우 '가후치'(니시지마 히데토시)는 극중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바냐 삼촌)을 연기한다. 하지만 그 연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극이 아니다. 각본은 같아도 그 각본은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각 배우에게 체득된 언어로 연극이 진행된다. 극중에서 관객은 마치 실제로 오리지널 캐스팅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볼 때 자막을 함께 제공되는 것처럼, 일본어가 아닌 대사의 뜻은 별도의 자막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미 두 연극 모두 일종의 '클래식'이 된 상황에서, 이렇다 할 설명이 없어도 시퀀스만으로도 극중의 연극 관객은 물론 다시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자막을 보지 않고서도 극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마구치는 이 '언어'를 서사와 연출 모두의 핵심 요소로서 활용한다. 작품은 전체 러닝 타임 중 2/3을 (가상의 연극제인) '히로시마국제연극제'에 상연될 연극 <바냐 아저씨>을 준비하는 과정을 비추고 있다. 그 연극은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 가지 언어들이 모두 섞인 모습이다. 그 언어는 때로는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 등의 아시아나 아시아를 넘어선 지역의 언어기도 하지만 언어장애를 지닌 캐릭터 '이유나'(박유림)의 '한국수어'처럼 음성적인 발화가 아니기도 하다. 지역이나 문법이 모두 다르고, 심지어는 발화의 형태 자체가 다른 언어들이 오랜 시간 상연되며 익숙해진 고전적 연극으로 뭉친다.
하나의 연극에 서로 다른 언어들이 모이는 모습은 작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외국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대사가 나오듯,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단박의 쉬운 이해를 돕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각본이 있기에 이 혼란스러울 것 같은 연극은 심각한 수준의 어려움이 없이 진행될 수 있게 된다. 도리어 연극의 준비 과정을 어렵게 하는 것은 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표현으로 드러나지 않은 행동들이라는 점에서, 이 역설은 더욱 극대화된다. 별도의 통역 과정이 필요 없는 같은 일본어를 사용하지만, 오히려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이 되어서도 각자가 마주하는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런 소통과 이해의 부재에서 '연극' 또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극중에서 명시적으로 가후치가 생각하는 연극의 메소드-방법론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그는 이미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일정한 메소드의 연기를 수행하고 있다. 가족이 서서히 세상을 떠나 자신만 혼자 남게 되는 과정에서도, 딸이 죽은 이후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도, 혼자 남게 된 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는 쉽게 자신이 그은 레이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그는 <바냐 아저씨>의 여러 언어들이 바벨탑처럼 섞인 상황에서도 꾸준히 일정한 톤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자신의 언어를 드러내야 할 상황에서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전까지 쉬이 자신에게 필요한 행동을 쉽게 찾지 못한다. 극중에서 가후치를 상징하는 배역인 <바냐 아저씨>의 '바냐'가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오랜 시간 동안 계속 회피하는 것처럼.
그런 레이어를 벗겨내는 것은 결국 가후치에게 익숙한 언어와 연기의 문법에서 비껴서있는 존재들이다. 그 하나는 오토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TV 드라마의 주연 배우이자 오토의 외도 상대이며, 가후치가 직접 오디션을 통해 '바냐' 역할을 맡게 한 '다카스기'(오카다 마사키)이다. 다카스키는 매사에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다. 그러한 삶의 자세는 가후치가 오토에 지닌 복잡한 심정을 낳게 한 직접적인 원인을 낳은 원흉이며, 끝내는 다카스기가 자신을 파멸시키는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카스기는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가후치 이상으로 오토와 교감할 수 있다. 가후치와 오토가 서로의 레이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다카스기는 자신에게 레이어를 씌울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솔직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다카스기의 자세는 레이어를 찢는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어도,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되지 못한다.
가후치를 조금이나마 레이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다른 존재는 히로시마국제연극제가 가후치에게 붙여준 전용 운전기사인 젊은 여성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이다. 가후치와 와타리의 관계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서먹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서로가 의외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둘 모두 서로에게 가장 애착이 깊었던 사람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이 있고, 갑작스러운 계기로 그 사람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둘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막을 싼채로 외부를 행보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와타리는 비록 과묵한 성격일지라도 자신이 버틸 수 없음을 어떤 식으로든 없다고 드러내고, 예의로 자신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와타리도 스스로 완전하게 막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와타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다시 누그러뜨릴 방법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연결되는 장소는 무대의 공간보다도 더욱 좁으며, 동시에 사적인 공간인 '차 내부'이다. 가후치는 녹내장이 찾아오는 순간에서도 어떻게든 운전대를 놓고 싶지 않아하고, 자신이 오랫동안 아낀 오래된 애차 사브 900을 꾸준히 운전한다. 극중 대사대로 사브 900은 가후치에게 있어 대사를 연습하는 공간인 동시에, 감정을 숨긴채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도피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 도피의 장소에서 감정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후치 본인도 이를 쉬이 내색하지 않는다. 와타리의 운전은 이와 비슷하지만 결은 같지 않다. 감정을 숨기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가후치와 비슷할지 몰라도, 와타리는 자신의 드라이브가 일종의 도피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떨어져 있지 않는 이 둘은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그리고 반드시 같은 공간에 존재해야 하는 '드라이브'라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조금씩 인식한다. 같은 언어를 쓰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언어와 행위를 취해야 하는 가후치는 엔진 소리나 풍절음 정도 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스스로 '도피'라는 선택을 취하고 인정할 때 자신이 오랫동안 피했던 것이 무엇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와타리에게 있어서도 도피에서의 복귀이자, 또 다른 움직임을 위한 하나의 단계가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렇게 원작의 플롯을 여러 단계의 갈래로 분절하고, 일종의 '사적인 군상극'으로 만들며 한 명의 개인, 그리고 개인과 개인, 다시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사의 구조가 무척이나 다층적이지고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그러나 작품이 3시간의 러닝타임을 거치며 흘러갈수록 쉽게 모이지 않아 보였던 이야기는 차츰 여러 개의 분절로 이루어져 있음을, 그리고 일종의 입체 퍼즐 조각처럼 퍼져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다형태의 언어'이자 '서로 다른 방향의 언어'로 풀어내는 영화의 방법론은 영화를 하나의 선 안에 갇혀 있게 만드는 대신,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가고 다시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힘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하마구치는 무라카미를 2020년대의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읽어내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은 물론 아시아- 그리고 다시 이를 넘어선 다양한 지역의 경계에 놓인 개인들을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그 모습은 결코 한치의 틈이나 흠도 없는 완벽한 것들은 아니며, 일정한 틈새가 존재한다. 그러나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티끌이 없는 세계를 공상하는 대신, 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틈을 지긋이 바라보는 개인'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진중한 함의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