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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May 01. 2022

압달라 알카팁 <리틀 팔레스타인, 포위된 나날들> 단평

현장의 당사자만이 담아낼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의 다이렉트 시네마

팔레스타인 문제는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오랜 시간 계속 꾸준히 창작물로서 제작된 소재입니다.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족히 지나가도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번의 평화 협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중반 열강이 멋대로 그어 놓은 지형도는 쉽게 메울  없을 정도로 뿌리 깊은 갈등의 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20세기를 거치며 무척이나 불안정한 공간이 되고만 서남 아시아(‘중동’) 정세가 팔레스타인인을 더욱 여기 저기 유랑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계이자 시리아 출신의 (그리고 지금은 시리아의 상황으로 인해 난민이 되어 독일에서 살고 있는) 감독인 압달라 알카팁이 연출한 <리틀 팔레스타인, 포위된 나날들>은 현지에 실제 거주 중인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다이렉트 시네마’입니다. 작품은 1957년 이후 형성된 가장 큰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인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야르무크 지역에 위치한 ‘리틀 팔레스타인’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시리아 내전 등을 이유로 봉쇄된 시기를 그립니다.


산발적인 교전과 공습으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이 일상이 된 가운데, 철저히 지역이 봉쇄되어 물과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이 중단되며 아사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작품은 실제 해당 캠프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이 캠프 지역에서 함께 봉쇄 상황을 경험한 감독이 든 카메라의 시선으로 현장의 모습을 짚습니다.



처음 드러나는 시리아 난민 캠프의 모습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황량하고 폐허 일보 직전의 건물이 이 상황이 마냥 좋지 않음을 보이지만,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대화가 이뤄지는 순간, 관객들은 이미 이 아이들이 너무 일찍 세상의 깊은 쓴 맛을 알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총소리가 나고 폭파음이 들려도 일상이 된 상황에서, 죽음과 부상 또한 이 곳의 거주민에게 있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하나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무려 60년 넘게 이어지며 거처를 잃고 쉽게 차별받기 쉬운 난민의 삶은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여러 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죽음이 일상과 함께 한다 하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과 식량을 얻지 못한채, 병에 걸려도 치료할 수 있는 약과 붕대가 없는채 죽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아닌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서서히 말라 죽는 것은 무척이나 끔찍하고, 카메라는 그로 인한 사람들의 심리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실제 거주민의 위치에서 최대한 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누군가는 체념하고, 누군가는 저항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제하는 자들은 카메라 속에서도 제대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항하는 자를 향해 겨누는 총성과 폭음이,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의 모습이 억압하는 자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보일 뿐입니다. 걸프전을 집중 취재한 CNN의 보도가 ‘전쟁의 오락화’로 큰 비판을 받았지만, 이미 현실의 전쟁과 학살은 너도 나도 본체를 숨기며 공격받는 이들을 직접 없애지 않고도 스스로 사라지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독의 카메라는 그러기에 더욱 현대 전쟁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자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피와 육편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이 절망으로 몰아넣는 구도를 짚고 있습니다.


게다가 봉쇄 상황 자체는 2015년을 끝으로 마무리 되었어도, 팔레스타인은 물론 시리아를 둘러싼 불안한 정세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앞서 감독과 가족이 독일에서 난민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이 놓인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작품은 애써 희망을 말하는 대신, 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순간에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삶을 유지하려 하는지를 말하려 노력합니다. 그 모습은 폭탄이 자신의 바로 옆을 스쳐가도 식량이 될 풀을 채취하는 모습이기도, 혼돈의 상황에서도 제대로 연습이나 조율도 되어 있지 않지만 자신의 상황을 말하는 노래를 피아노 연주와 합창으로 부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전 정보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설령 모르고 있더라도 작품의 결말부에서 이 상황이 어떤 귀결을 향해 나아갈지는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습니다. 대신 감독은 자신이 어렵게 카메라에 담아낸 이 기록을 다시 반추하고 편집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며, 자신이 본/또는 카메라로 담아낸 ‘현장 내부의 시선’은 이러하였음을, 그 사실은 결코 쉽게 지워버릴 수 없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리틀 팔레스타인>은 당사자가 직접 카메라를 손에 들었을 때의 어떤 기록이, 어떤 파장을 생기는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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