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이 지니는 속성과 역설을 인식하듯이 인물과 사회를 응시하기.
※ 작품에 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주의하여 읽으시길 바랍니다.
<브루탈리스트>는 ‘건축’에 관한 영화입니다. 물론 이미 공식 홍보물에 언급이 된 내용이니 이 자체는 특이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저 건축가가 주인공이고, 건축물을 짓는 과정이 내용의 큰 축을 이루는 이상으로 영화 자체가 ‘건축’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다시 건축물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작품의 골조로 가져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모든 창작물이나 제작물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건축은 아우라를 무척이나 품기 쉬운 창자물입니다. 아무리 작은 건축물이라도 인간 몇 명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를 차지하게 되니까요. 게다가 건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하드웨어이자 일정한 플랫폼이 될 수 있는 산물이기도 합니다. 잘만 관리가 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외형과 내부가 유지되며 매우 오래 이어질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역사가 공간 그 자체에 쌓여갑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건 건축의 그러한 속성이 건축이 진행된 과정이나 여러 맥락들을 쉽게 가리기에도 쉽다는 것입니다. 건축은 어떤 식으로든 ‘육중한’ 산물이고, 그 육중함 물성은 그 자체로 아우라를 낳기에도 쉽지만, 그 아우라는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결코 쉽게 줄일 수는 없습니다. 건축을 결정하고, 이를 짓기까지에 무척이나 많은 논란과 문제와 가볍지 않은 맥락이 있어도 결국 건축물은 완전히 파괴되거나 발길을 완전히 끊는 폐허가 되지 않는 이상 단초와 과정의 맥락을 넘는 아우라가 형성됩니다.
한국에서는 <브루탈리스트>로 처음 그의 작품이 영화에 걸리는 브래디 코베는 건축이 지니는 이러한 속성을 무척이나 중대하게 인식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건축물의 완성된 형상이 하나의 표상이 되어 맥락을 납작하게 만들기 쉽다면, 건축물에 관여한 사람들과 건축물이 들어선 공간과 역사의 맥락도 쉽게 납작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좋게 되겠죠. 그렇다면 이 건축물이 기획되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살려버리면 어떨까요. 가상의 건축가가 지은, 가상의 건축물이지만, <브루탈리스트>는 그 가상의 건축물이 짓기까지의 과정을 매우 긴 러닝타임으로 낯낯이 보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과정’과 ‘맥락’을 분명하게 생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가상 건축물의 이름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지어졌다는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이고, 이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인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입니다. 그리고 그 건축물을 의뢰한 사람은 지역의 갑부인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이죠. 라즐로는 이래저래 건축에 유능한 재주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지금도 유명세가 드높은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건축을 배웠고, 헝가리에서는 부다페스트에선 시립 센터나 공공 도서관을 지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나치의 광풍과 제2차 세계 대전의 폭풍은 그가 이전 지녔던 명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이젠 그는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타 존스)와 천애고아인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와 떨어져 혼자 미국에 온 동유럽 출신에 억양도 어딘가 독특한, 그리고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일 뿐입니다.
라즐로는 어찌어찌 미국에 먼저 정착해 가구 사업을 하고 있는 사촌의 도움을 받아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라즐로의 삶은 궁핍해 보여요. 어찌어찌 몸을 누일 곳은 찾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무료 급식소를 전전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그래도 라즐로의 운이 이제서야 풀리려는지, 사촌이 몇 번 인테리어 의뢰를 받아준 적이 있던 ‘해리 리 밴 뷰런’(조 앨윈)의 의뢰를 받고 간만에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집니다. 해리가 쌍둥이 여동생 ‘매기 리 밴 뷰런’(스테이시 마틴)과 함께 아버지 해리슨이 잠시 집을 비우는 동안 깜짝 선물로 저택 서재를 리모델링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죠. 그러나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해리슨은 아직 공사로 난장판인 모습에 역정을 내면서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서재 리모델링은 중도에 끝이 나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사촌에게도 쫓겨나면서 라즐로는 막노동을 하면서 겨우 삶을 유지하는 마약 중독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게 밑바닥 인생을 살던 라즐로에게 다시 해리슨이 찾아옵니다. 그렇게도 해리슨이 화를 내면서 싫어하던 라즐로가 설계한 서재가 대중 잡지에 기사가 실리면서 ‘진취적인 사업가에 걸맞는 서재’로 소개가 된 것이죠.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이전 서재 리모델링 작업에서 받지 못했던 대금을 지급합니다. 이윽고 라즐로를 초대한 저택 파티에서는 저택 너머 광활한 땅에 어머니 ‘마가렛’의 이름을 딴 대형 지역 커뮤니티 시설을 만들고, 그 건축물의 설계는 라즐로에게 만나겠다고 깜짝 선언을 합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악연인 줄 알았던 인연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이야기면 참 좋겠지만, 영화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그다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도 싫어하던 인테리어를 잡지에서 자신을 띄워주는 모습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에 갑자기 마음을 풀고, 사전에 라즐로와 논의도 없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짓겠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건축가를 존중해주려고 할까요. 라즐로에게 찾아 올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유럽에 발이 묶여 미국에 오지 못한 에르제벳과 조피아와 긴 헤어짐 끝에 해후를 하여도 쉽게 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작품이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설계 도면의 차가운 질감의 폰트가 만드는 관조의 감각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작품의 마지막 시퀀스가 다름 아닌 (실제로도 1980년에 시작한) 1980년 제 1회 베니스 국제 건축비엔날레인 것은 이 작품이 노리고자 한 방향에 더욱 쐐기를 박는 느낌이죠. 매우 미시적인 수준까지 추적과 탐사를 거듭한 건축물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보는 감각처럼, 이 작품은 1980년 기준 비엔날레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 건축가가 된 라즐로가 설계한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과연 어떠한 맥락이 있었는지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라즐로는 여러모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원래 헝가리에서 건축가로 가지고 있던 명성은 해리슨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죠. 사촌에게 쫓겨난 이후로 더 심해지긴 했지만, 그전에도 얼굴을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헤로인으로 진통을 해온 탓에 이미 마약엔 어느 정도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사랑했던 아내와 조카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난했던 상황도 그를 힘들게 만듭니다. 지금은 많이 줄긴 했지만, 1940-1960년대 당시에는 더욱 심했을 유태인에 대한 편견도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슬쩍 그에게 많은 고통을 미치죠. 여러모로 그는 사회의 압박은 물론, 물주인 해리슨의 압박에도 시달리는 스트레스에 끊임없이 시달립니다.
그러나 라즐로는 그저 고통을 받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다양한 맥락으로 고통을 주는 표상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그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 고통을 자신만의 맥락으로 풀어오는 이중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내를 그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매매를 하고, 술과 마약을 비롯해 온갖 물질에 중독되어 있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쉽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건축을 담당하면서 무수한 좌충우돌에 시달리면서 더욱 초췌해지지만, 동시에 이 건축물의 공사는 역설적으로 라즐로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맥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는 자신을 쉽게 재단하는 표상에 힘들어 하지만, 다시 그 표상에 자신을 맡길 때 그는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라즐로 뿐만 아니라 라즐로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미국에 도착해 남편 라즐로를 만났지만 남편이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물주인 해리슨과 미국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구할 수 없는 현실 모두에 지친 에르제벳도, 자신을 성적으로 관심있어 하는 남성들에게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침묵하는 존재가 된 조피아도, 심지어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해리슨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뿐, 모두가 자신에게 묶인 표상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방면으로는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맥락을 재해석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작품 속 인물의 초상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결코 단일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복잡성을 지닌 형태로 재구축이 되기 시작하는 거죠.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의 진행 유무를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대로 여러 맥락을 갖다 붙일 수 있는 해리슨 역시도 자신을 감싼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겉모습이 사실은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벗겨질 수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 상황에서 정작 라즐로가 짓는 건물은 이전의 건축 기법과는 매우 다른, 오로지 노출 콘크리트로만 외벽과 내부를 메우는 ‘브루탈리즘’(brutalism) 양식입니다. 이렇다 할 포장이나 장식 없이 콘크리트가 가지는 물성과 특성 그 자체만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모던한 건축 사조이지만, 이 양식으로 건물을 설계한 라즐로는 결코 단일한 특성을 지니지 않은 복잡한 존재입니다. 이 건물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이들 모두가, 아니면 인간이난 존재 자체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죠. ‘브루탈리즘’의 ‘브루탈’이 본래는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뜻하는 ‘베통 브뤼트’(Béton brut)에서 따온 말이지만, ‘brutal’이 영어로는 ‘잔혹한’이나 ‘야성적인’을 뜻하다 보니 종종 이로 오인하기도 하는 단어의 특성을 이용이라도 하듯 라즐로를 비롯한 등장인물 거의 모두는 겉으로는 일정한 양식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일정한 틀에서는 이미 벗어나 있는 ‘야성’이나 ‘잔혹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타인을 인식하고 대하는 점에서는 특히나 더 말이죠.
그 ‘타인에 대한 응대’에서 기인하는 잔혹함은 결코 그 자체로는 자극적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디. 초반과 후반의 성적인 장면은 어느 정도는 섹슈얼리티하게 그려지지만, 정작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폭력은 카메라가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매우 어두워 형상도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게 그려지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나오는 말들, 쉽게 치솟아 오르는 감정적인 언행들은 얼핏 보면 그냥 일상의 한 단편처럼 보일 정도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언행을 행사한 사람들도 정말 자신의 행동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죠. 그러나 이 행동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그리고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 모습을 들여다보는 이들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 순간들을 감싸는 맥락을 납작하게 만들려고 해도, 당사자는 그 맥락에서 이미 대상화가 된 사람들이고, 다시 이를 더욱 전지적으로 쳐다보는 서사와 화면 외부의 ‘관객’인 사람들은 그 맥락을 인식하면서 볼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하지만 더욱 기막힌 것은 자신이 당한 맥락의 행동을 다음 행동의 맥락으로 이어지며 흐름을 살리는 이들이, 결국 또 어느 순간에는 자신과 결부된 또 다른 맥락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맥락을 다시 호출하면서도, 어떤 맥락은 연결고리를 끊어지거나 본래 가진 복잡하고 쉽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흐름을 무화시키면서 쉽고 간명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러한 맥락의 쓰기와 지우기가 반복되면서, 결국 어떤 식으로든 건축물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건축물은 집합체로 호명되고,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 회고가 되면서 더욱 납작해집니다. 후반부에 몰아치고, 결국 결말에서 어떤 ‘정전’(canon)으로 일단락 지으려는 모습은 여러모로 많은 단상이 들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쉽게 흩어지기도 쉽고, 자의적으로 다시 만들어 공식화시킬 수도 있는 ‘맥락’을 건축물, 그리고 건축물을 접하는 이후의 사람들의 시선으로 다시 풀어내는 메타적인 접근으로 개인과 사회를 차갑게 관조하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의 면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하나인 것처럼 말할 수 있으며, 다시 개인들이 뭉쳐 더욱 복잡한 맥락을 지닌 사회를, 그리고 역사를 어떤 식으로 납작하게 운운할 수 있는지를 이 지난한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납작해지는 맥락에는 ‘정상 가족’도, ‘자본주의’도, ‘미국 사회’도 모두 들어가 있죠. 그리고 ‘이스라엘의 탄생’ 까지도 말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거리두기의 감각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앞에 등장하는 모습을 청사진(blueprint)로 들여다 보는 건물의 구조도처럼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형태의 조감도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완성되기까지 수차례나 지워지고 다시 작성되기를 반복하며 탄생하는 모든 버전들을, 심지어는 실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결코 지워낼 수 없는 조감도 저류의 맥락까지도 모두 한 장씩 꺼내면서 켜켜이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조도가 거대한 표상 그 자체가 된 건축물로, 그 건축물과 건축가를 논하는 납작해진 맥락으로 압축되는 하나의 ‘폭력’까지 도달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회와 구조를 어떻게 들여다 보고 접근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브루탈리스트>는 정말 첨예한 수준으로 도달한, 매우 이상적인 형태의 건축 또는 역사 연구를 영화의 형식을 빌어 만든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