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와 ‘히어로물’이 연상호의 밑에서 만나는 순간
* 중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추후 상세한 비평을 다시 쓸 예정입니다.
<염력>은 분명 한계가 있는 작품이다.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한계는 연상호의 지난 작품들에서 부각되는 문제다. <지옥 - 두 개의 문>을 비롯하여 근작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연상호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는 그가 스스로 보인 자신만의 작품 철학 ‘노골리즘’에 충실했다. 아낌없이 폭력을 드러내고, 현실의 어두움을 들춰낸다. 게다가 모든 인물들은 입장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정을 붙이기 어려운 위악을 취한다. 그러기에 연상호는 주목받을 수 있었지만, ‘폭력의 전시’ 이상으로 전개를 이끌지 못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부산행>와 이번 <염력>에서는 그 강도를 줄인 편이지만, 여전히 현실의 어두움이라는 요소는 강하게 드러나고 상대적으로 희망적인 결말이나 전개와 결합되며 언밸런스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라는 존재 역시 비판의 한 지점이 된다. 각 작품들마다 아버지의 요소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가부장’으로써 불완전한 위치에 처해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가정은 나오지만 이미 붕괴했거나 붕괴 직전에 있고, 가부장의 권위를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아버지’는 어떤 식으로든 자식이나 타인에게 손을 대며 권위 회복을 시도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모두가 비교적 공평하게 폭력을 당하고 나락에 떨어지니 이러한 묘사가 하나의 ‘비꼼’이 될 수 있었지만, 독기의 강도가 낮아진 실사 영화에서는 도리어 ‘가부장의 부활’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심은경의 캐릭터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주체에 놓여 자신만의 행동과 생각을 지녀야 할 ‘루미’의 존재는 집을 떠난 아버지 석헌(류승룡)이 돌아오며 타이틀롤에 있지만,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그는 석헌을 통해 구원을 받거나, 철거 현장에 결합한 변호사 역을 맡은 박정민이 사랑을 바치는 대상이 된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가족을 떠난 뒤 일종의 ‘소녀 가장’이 되었을 캐릭터의 특성은 그렇게 무화되고, 히어로물의 구조적 한계 상 히어로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만 그친다.
여기에 작품의 전개나 장면의 연출도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쭉 고통의 일변도로 흘렀던 연상호의 애니메이션들이나, 위기와 갈등의 순간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부산행>과 달리 <염력>은 희극과 비극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슬픈 장면이 나오다가도 어느 순간 코미컬한 시퀀스가 나오다, 다시 고통의 흘러넘치는 씬으로 전환된다. 어떤 점에서는 작품이 희극이 비극을, 다시 비극이 희극을 낳은 ‘블랙 코미디’로써의 현실을 그리고자 한 선택이겠지만 그 결과물은 지속적으로 덜컹이고 있다.
또한 3면에 동시에 영상을 보여주는 ‘스크린X’에 맞춰진 영상 편집과 연출 구도 역시, 일반 포맷으로 감상할 다수의 관객들에겐 감흥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석헌 염력을 사용하는 액션 시퀀스에서 주로 사용되는 스크린X는 넓은 3면을 모두 활용하며 호쾌하고 리드미컬한 감각을 보여주지만, 좌우면을 제거하는 순간 액션의 동선과 범위는 급감한다. 스크린X에 최적화시키는 선택이 역설적으로 그 이외의 환경에서 관람한 관객들의 작품 접근에 어깃장을 놓는 셈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들 덕분에 <염력>은 2018년의 <리얼>이란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염력>이 지닌 흥미로운 요소를 결코 무시하기 어렵다. <염력>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기반으로 히어로 장르를 전개하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권력과 사적 폭력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마블 코믹스, 신적 존재와 자경단의 충돌을 그리는 DC 코믹스의 대결 구도와 달리 <염력>의 히어로가 겪는 주된 갈등 대상은 ‘자본’이다. 1차적으로는 자신의 딸과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용역 깡패’이며, 궁극적인 대상은 이들을 고용한 태산그룹의 ‘홍상무’(정유미)이다. 작중의 공권력은 이미 자본에 자유롭지 않고, 석헌 또한 원래 압도적 존재와 싸우는 대신 피하는 길에 익숙하다. 결말부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래 거부인 아이언맨이나 배트맨과 달리, 신적 존재인 토르나 슈퍼맨과 달리, ‘서민’이어도 딱히 크게 개의치 않는 스파이더맨과 달리 석헌은 부자도, 신도 아니다. 저소득층의 삶은 바로 석헌에게 영향을 미친다. 2010년작 <초능력자>가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을 변용한 모습에 가까웠다면, <염력>은 우연히 힘을 지닌 존재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머무를 때 태어날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동시에 이는, 앞서 언급한 석헌의 가부장적인 자세와도 연결되는 시선이기도 하다.)
여기에 작품이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작품의 묘사에 차용하는 ‘용산 참사’라는 소재도 작품의 결을 다층적으로 만든다. 용역과 함께 철거민을 공격하는 ‘공권력’의 존재, 태준식의 <당신과 나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바리케이트와 진압 장면, 피상적이며 편향적 접근으로 가득찬 언론, 그리고 용산 참사의 이미지가 되고만 ‘불타는 망루’. <염력>은 이러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디테일로써 사용되어 작중의 이야기가 단순한 픽션이 아닌 주변의 이야기임을 상기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 역시 마냥 긍정적인 결과로만 남지는 않는다. 상업 영화로써 용산 참사를 다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치더라도, 작품 전반에 서린 ‘히어로 장르’의 요소와 현실의 파편들이 어우러지는 대신 서로 붕뜨는 것은 물론 실제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희망찬’ 결말은 소재 사용 이상으로 더 작품이 나아가지 못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분명 <염력>은 아쉬운 순간이 많다. 의도적인 ‘B급 블랙 코미디 액션 히어로물’이라 치더라도 좀 더 유려한 전개나 연출이 있었더라면, 이토록 혹평에는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다. <염력>이 부분부분마다 보이는 히어로물의 한국적 변용은 연상호가 용산 참사를 ‘히어로 장르’로 풀어내기 위해 느꼈을 고민이 느껴진다. 한 발짝만 더 나갔으면 어땠을까.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염력>은 분명 일반적인 관객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이 비극적 현실을 한 축으로는 장르로, 다시 한 축으로는 현실 자체를 드러내며 합치려는 선택 자체가 쉽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각각의 축으로써는 유의미한 지점을 드러내는 것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안타깝게도 이 두 축이 유기적으로 흐르지 못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