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는 갈려도, 드디어 여성을 중심에 삼은 익스플로이테이션이 나오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1970년대 미국에서 나온 어떤 작품의 부류를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68 운동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던 순간, 미국 대중영화에서는 갑작스레 <브라큐라>(블랙큘라)나 <블랙 벨트 존스> 같은 작품이 등장했죠. 모두 흑인이 주조연을 맡은 작품이었고요. 작품의 스토리나 연출은 어디서 이미 봤거나 조악한 수준의 작품도 부지기수였지만 많은 환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흑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흐름과 겹쳐, 자신들을 위한 작품이 드디어 나왔으니까요. 이른바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의 시대였습니다.
왜 <미쓰백>을 말하는데 갑자기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말하냐면, <미쓰백>은 좋은 의미로 한국에서 튀어나온 일종의 ‘우먼스플로이테이션’(Women Exploitation) 무비에 가까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소개된 <더 빨리 푸시캣, 죽여라 죽여>(1965)처럼 말입니다. 이제는 컬트의 반열에 오른 <더 빨리 푸시캣…>은 분명 여러모로 엉성하고, 조금만 연출을 바꿨으면 좋았을 영화입니다. 영화적인 완성도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았던 건, 68 운동 직전 페미니즘이 고조했던 시기 여성을 주체적인 액션의 전면에 내건 몇 안 되는 영화였기 때문이죠.
<미쓰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쉬운 장면들이 먼저 눈에 어른거립니다. 백상아 또는 ‘미쓰백’(한지민)이 위기에 놓일 때면 어김없이 그녀를 사랑하는 형사 장섭(이희준)이 버팀목이 되고, 꽤나 강도높게 폭력과 학대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드라마를 이어주는 시퀀스 역시 우연에 의존하는 순간들이 많아, 좀 더 다듬었으면 매끄럽지 않았을까 싶은 지점들이 보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백>은 꽤나 좋은 의미로 익스플로이테이션이 지닐 수 있는 장점을 확연하게 드러냅니다. 앞뒤 안 보고 마구 페달을 밟지만 동시에 영화가 향하는 방향은 철저히 ‘여성’을 응시하고 있기에 열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몇 년전에 성폭행 당한 여성의 피해와 복수를 소재로 은근슬쩍 우먼스플로이테이션인 척했던 <어떤 살인>이나 <위선자들> 같은 작품이 여성은 주인공에 머무를 뿐, 남성의 욕망을 그득히 투사했다면 <미쓰백>은 치닫는 방향도, 향하는 대상도 ‘여성’을 명확히 향하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우먼스플로이테이션에 속하는 드라마입니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여죄수 사소리> 같은 ‘여죄수물’과는 또 다른 방향성을 향한다는 점에서 인상을 줍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대신 (심지어는 ‘가해자’의 위치에 놓이는 여성까지도) 철저하게 계속 착취받고 피해받는 상황에 초점을 기울이며, 학대와 폭력에 대한 강도높은 묘사를 제외하면 의외로 영화는 ‘피해자들의 연대’에 충실한 묘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감독부터 (최근 <상류사회>로 혹평을 받았던) 변혁의 <주홍글씨>, 한재림의 <우아한 세계> 같은 소위 ‘남성 중심 폭력 영화’ 제작부에 있었기에, 이를 반면교사 삼으면서도 폭력과 드라마가 흥미롭게 조화된 결과물을 보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분명 ‘웰메이드’를 기대했으면 아쉬울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웰메이드’여도 현 시대의 가치를 망각한다면 사랑받기는 쉽지 않죠. <더 빨리 푸시캣…>이나 수많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작품성’으로 사랑받은게 아니라, 중점에 놓는 대상의 정체성으로 인해 열광받았듯 말입니다. 여러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메시지를 전하려 애를 쓴 지점도 보이고요. 배우의 측면에서도 한지민은 메인 캐릭터로서 자신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이희준은 이제야 낭비되지 않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취향을 떠나, 이제야 비로소 한국에서도 우먼스플로이테이션이 나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