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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통찰

강아지의 딜레마

행복을 얻고 자유는 줄어든다

by 한상훈

'강아지의 딜레마'라고 누가 정한 건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부르는 개념이 있다. 강아지의 딜레마는 이렇다. 아주 귀여운 강아지를 얻은 사람은 행복해진다. 강아지와 함께 노는 것도 즐겁고, 나를 졸졸 따라오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강아지와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다. 일도 해야 하고, 밥도 차려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한다. 강아지를 홀로 내버려 둬야 할 때도 있다. 강아지를 동반하지 않고는 여행을 가기 쉽지 않다. 누군가 보살펴줄 사람을 구해야 한다. 강아지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밥을 챙겨줘야 하고, 대소변을 치워줘야 한다. 행복을 얻었지만 동시에 책임이 생기고 자유는 줄어든다. 이게 내가 종종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강아지의 딜레마다.


가족도 비슷하다. 가족을 만들어가는 행위는 행복을 위해서지만 동시에 행복과 자유가 줄어드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혼자 살던 남자가 결혼을 하면 이전처럼 자유롭게 살 수는 없다. 마음대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경우에 따라선 외박을 한다? 방금 결혼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가정 불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이 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얻음에서 얻는 행복도 있지만 아이로 인한 괴로움도 얻는다. 아이는 스스로 자라기도 하지만 보살핌이 필요하다. 한밤 중에 울기도 하고, 배고프면 먹여야 하고, 옷을 사입혀야 하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제약이 생김에도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다. 사랑을 함과 동시에 사랑을 받으면서 삶의 행복을 느낀다. 그 과정 속에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줄어들고 책임은 늘어나도 말이다.




애정을 주는 행동은 때로는 가장 큰 괴로움을 주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연인 사이에 이별이 그러하다. 큰 행복감을 주는 관계가 어느 날 깨지게 됐을 때 느끼는 고통과 상실감은 행복의 크기에 비례한다. 행복이 컸다면 고통도 크다. 이별이라는 것은 꼭 상대방과의 갈등으로 인해서만 생기지도 않는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사별하거나 여러 가지 환경적 이유로 인해서도 생길 수 있다.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않을 고통인 셈이다. 그럼에도 사랑할 대상을 찾고 동시에 사랑을 받는 것은 소중하다. 언젠가 강아지가 내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갈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고, 밥과 물을 챙겨주고, 때로는 귀찮은 산책도 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사람에 대해 배신감, 회의감을 크게 느끼면 사람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이 애정했고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느낄 필요가 없던 감정인 셈이다. 어찌 보면 거대한 사업을 일으킨 이들 중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사람들을 착취했다는 기업가가 많은 것은 그들이 사람을 애정과 신뢰로 대한게 아닌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봤기 때문일지 모른다.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람을 대했다면 배신이라는 것은 공정상에 발생한 결함에 불과할 것이다. 감정적으로 동요받지 않고, 결함에 대응해 다른 인력이나 관계를 찾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비인간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상처받지 않고 거대한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예로 실력 있는 의사의 비유가 있다. 우리는 의사가 얼마나 감정적 공감을 잘해주는지보단 실력이 중요하다. 인간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의사일지라도 중증 암환자나 매우 위험한 수술을 감정의 변화 없이 해낼 수 있다면 그 의사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반면 환자의 상태나 상황, 감정에 영향을 받아 수술 중에 평정심을 잃게 되면 오히려 환자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든다.


인간은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면 동정심은 느끼고, 공감각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감각이 무딘 사람만이 감정적으로 에너지 소모 없이 살을 자르고, 봉합하고, 피와 몸 안에 불순물들을 보면서도 할 일에 집중하기 쉽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양면성을 지닌다. 누군가는 강아지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털 있는 짐승이라며 질색한다. 누군가는 공포영화를 봐도 팔다리가 잘리는 모습을 봐도 두려움을 못 느끼고, 누군가는 마치 자신이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동일한 공포와 감정은 선명히 느낄 수 있다. 각자가 창조해 내는 결과는 다르다. 사회는 이 모두를 필요로 한다. 일말의 동정심이 없는 이들도 필요하다. 과도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도 필요하다. 쓰임이 다르고 잘하는 일이 다르다.


행복과 자유가 때로는 상치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도 때로는 대립관계에 놓인 것처럼 서로의 쓸모가 전혀 없어 보이고, 최악의 인간으로 서로를 볼 수도 있다. 강아지를 키우며 얻는 행복과 잠재적으로 잃게 된 행복을 정확히 계수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의 다름으로 생기는 득과 실의 합을 계수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은 그래서 놀랍도록 혼란하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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