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5.
친구들과 야구를 보고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한 가지 선명한 기억이 남았다. 노약자석에 앉은 한 젊은 남성은 반팔티를 입고 있었고, 그의 왼쪽 팔에는 수많은 자해 흔적이 보였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감추지 않고 드러낸 자해의 흔적은 상당히 기괴할 정도로 섬뜩했다.
보통의 자해 상흔은 크기가 깊지 않거나 많지 않겠지만 그의 경우는 달랐다. 아주 많은 상처가 팔 안쪽을 가득 메우고, 상처만큼이나 힘들어 보이는 모습도 역력했다.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지하철에서 내려 도착할 곳에서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태원에서 종종 마약 중독자들을 봐왔기에 나는 마약 중독자들의 모습을 조금은 알고 있다. 흡입형의 경우에는 티가 덜 나지만 주삿바늘을 이용하는 이들은 정맥이 흐르는 곳이 만신창이가 되어간다. 강남역에서 하루는 핫도그를 사 먹고 싶어 지하상가에 있는 명량 핫도그로 향했을 때였다. 그곳엔 양 팔이 곰보처럼 주삿바늘로 망가진 팔을 한 젊은 여자 2명이 나보다 앞서 핫도그를 고르고 있었다. 둘은 한참을 고르다가 정작 주문은 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피부의 상태와 눈빛, 그리고 팔의 상태를 보았을 때 아주 높은 확률로 약에 중독되어 있는 이들로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한 때는 나도 자해를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자살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하게 되는 자해일 것이다. 나는 자살에 대해서 아주 선명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자살은 쉽게 이뤄지지 못한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 과정을 시도하는 단계까지 가더라도 느껴지는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일종의 문을 넘어야 하는 것인데 생명체가 스스로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아주 끔찍하고도 힘든 일이다.
아마도 지하철에서 본 상흔이 가득한 남성의 경우엔 여러 번의 임계점까지 도달하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의 상처가 심리적 이유로 반복적으로 자살과 무관한 자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인생을 알지 못하니 단정할 순 없지만 두 가지 모두 잔혹한 삶의 굴레 속에 살고 있는 청년이라는 건 선명해 보인다.
마약에 대해서도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마약은 자해다. 큰 쾌감을 얻기 위해 작은 쾌감을 서서히 녹여버리는 것이다. 순간의 환상적인 색채를 보기 위해 평상시에는 색감을 느끼지 못하는 눈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한 순간의 미식을 먹기 위해 평상시에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는 삶을 택하는 것과 같다. 세상이 흑백 TV로 바뀌고, 무엇을 먹어도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고. 그 어떤 것에서도 재미와 즐거움을 찾지 못하게 되고. 결국 남은 즐거움은 마약 밖에 안 남게 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자해라 할 수 있다.
자해를 말할 때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선명한 상처들에 집중한다. 눈에 보이는 칼자국. 주삿바늘 자국. 엉망이 된 피부.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그러나 자해의 진짜 상처는 그들의 영혼에 남아있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선명하게 보이는 흉터가 시간이 지나면 연해지는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흔적을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반면 영혼에 남은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더 깊고 오랜 세월에 걸쳐 회복되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영혼에 난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가하며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영혼에 가하는 상처는 외부에서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내면이 무너지면서 완성된다. 내면의 무너짐이 선명해지면 영혼의 큰 부분이 잘려나가 텅 비어버린 공간을 만들고, 텅 비어버린 공간만큼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환상통이 아닌 아주 실제적이고 선명한 고통 말이다.
영혼의 자해는 육체적 자해와 결이 다르다. 절망. 우울. 열등감. 패배감과 같은 온갖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찮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좌절감으로 몰고 간다. 겉보기엔 큰 차이가 없으니 티가 나지 않지만 영혼에 난 자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상처가 아물며 상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상처가 나본적 없이 상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천지 차이다. 화상을 경험해 본 사람은 화상의 고통을 알고 있다. 내면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상처도 화상과 동일하다. 매우 고통스럽고, 새 살이 돋아나고 다시 벗겨지기를 반복하면서 내면이 치유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영혼의 모습도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시니컬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상처 입은 이들을 사회에서 쉽고 선명하게 만나긴 어렵지만, 크던 작던 인간은 대부분 잔병을 치르듯 상처가 남는다. 인생이 살아볼 만한 이유는 아무리 끔찍한 비극과 상황이 개인에게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나만 겪는 일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왔고, 이제는 상처와 무관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오히려 큰 상처를 이겨낸 이들이 써 내려간 용기의 역사가 더 많은 이들에게 거대한 울림을 주어 무너진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비극적인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인생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경험이자 놀랍도록 자랑스러운 순간일 것이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처럼.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성장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는 이로 성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받은 것보다 주어진 것보다 넘치게 세상에 돌려주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베푼 것들로 누군가는 생명을 값 없이 받는다.
삶이 아무리 지옥 같았을지라도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에게 용기가 된다. 위대한 인간의 기록은 업적으로 위대함이 남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해오면서 살아왔는가.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부터 한걸음, 한 걸음씩 다시 올라왔는가. 그래서 나는 믿기에 만약 우리의 죽음 뒤에 더 놀라운 세상이 있다면, 그곳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가장 높게 빛나고 있으리라 믿는다. 인간의 기준에서 정한 위대함이 아닌 공명정대한 신의 눈으로 본 빛나는 영혼들.
그 영혼들은 분명 상처 하나 없는 기쁨의 흔적만 있는 이들이 아닐 것이다.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을 모두 감당하면서도 결국 옳은 길을 택한 이들. 하찮고 모자라고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바닥을 누비더라도 위대한 선택을 해온 이들이 위대하다 평가받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성경의 이 메시지를 좋아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마태복음 25장 4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