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잡담문

2025. 6. 25.

by 한상훈

더웠다.


무척.


밖에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비.


이름도 참 예쁘다.


여름비.


더위를 씻어주는 비가 내리니 오지 않는 잠이 지금이라도 올 것만 같다. 조그만 선풍기를 틀어두어 뜨겁게 달아오른 손을 식힌다.


나는 종종 손이 무척 뜨거워지곤 한다. 특별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주 가끔.


그렇게 손이 뜨거워지면 붉은 열꽃이 손바닥에 핀다. 약간의 열감과 부어오름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아주 가끔 있는 드문 일이니까. 빈도로 따지면 늦은 밤 시원한 여름비가 내리는 확률만큼.




나는 단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짠 것을 좋아했다. 감자튀김이나 짠 과자류. 프링글스 같은 것.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부드럽게 단 것들에 빠졌다.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커피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말이다. 밤이고 낮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나름의 규율이 있다. 설탕이 들어간 커피는 하루에 1잔. 아이스크림은 1주에 한 번 정도.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생각보다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통이 사실 같다는 걸 가르쳐준다. 그게 정말일까.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의도적인 고통. 가령 냉수로 몸을 씻는 것은 온도에 적응하기 전까지 꽤나 곤욕이다. 하지만 의도된 고통을 견디고 나면 그 이상의 쾌락이 온다. 일도 비슷하다. 하기 부담스러운 일을 묵묵히 견디며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로 인해 얻는 뿌듯함과 성취감은 상당하다.


요리도 비슷하다. 요리를 하는 과정은 꽤나 번거롭고 귀찮다. 하지만 요리를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하고, 정리하고, 그릇과 식기를 씻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나고 나면 맛있는 음식이라는 보상이 생긴다. 그래서일까. 분명 음식점의 음식보다는 맛이 떨어질지라도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을 때 기분은 훨씬 좋다. 무척이나 말이다.


출근과 퇴근도 비슷하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사실상 같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러 가는 말걸음은 무겁지만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같은 시간을 보내도 즐겁다. 분명 출근은 더 오래 걸린 것 같은데 퇴근할 때는 훨씬 빨리 도착한 기분이다. 걸린 시간이 같더라도 말이다.


쾌감을 끝까지 추구해 봤자 고통이고. 고통을 끝까지 추구하는 미친 인간은 아니니 적당히 하면 쾌감이 된다. 그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인생은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다. 인간은 각자 추를 가지고 있어서, 한쪽 끝으로 과도하게 몰아가면 반대쪽으로 돌아오는 관성력으로 괴로움도 커진다. 자신의 마음에서 생기는 요동과 불안을 인지하고 때로는 고통에, 때로는 쾌락에 적당히 따르는 것. 그게 꽤 괜찮은 방향 같았다.




흔히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강하게 여기곤 하지만 정작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너진다. 묵묵히 일만 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았나. 인간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러 살려달라 애원하도록 DNA에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는 인간 본성의 작동 방식보다도 책임감이라는 무게로 비명을 지르기보단 침묵으로 괴로움을 견디게 설계되었나 보다.


어린아이 같던 사람도 한순간에 바뀌는 순간은 올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일 것이다. "나"를 사랑하며 살아온 인생에서. 내가 아닌 타인. 배우자든 자녀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기면서 사람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잃게 할지도 몰라도 말이다.


아마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도 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진 못하겠지만 다수의 부모가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손익을 따진 계산서가 아니다. 진정 부모가 되면서 변화된 모습일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도망칠 싸움이라도 싸워야 하고. 자신이 못 입고 조금 못 먹어도 아이를 먹이고, 입힌다. 자신을 초월한 존재를 위해서 살기 시작할 때. 사람은 분명 다른 기준으로 살게 된다.




짤막한 순간에만 맛있는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먹다 보면 꽤 많은 양을 처음 받았을 때, '이거 꽤 먹겠는걸?' 하지만 정작 먹다 보면 금세 사라진다.


인생은 아이스크림과 너무도 닮았다.


맛은 조금씩 바뀌지만 달콤한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기다리는 날도 있다.


무더운 날에 밖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무척이나 괴롭고 곤욕스러운 날이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앞에 줄은 조금씩 줄어들고, 나의 아이스크림이 도착하는 순간이 온다.


'이야 이거면 배불리 먹겠는걸?' 하고 내가 원하는 맛으로 골라 담은 아이스크림.


인생은 내가 원하는 맛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맛보는 삶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맛을 정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고, 맛도 못 보는 삶도 있는 것 같다.


내 삶에 살아 숨 쉬는 이 날들이 기회였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세상이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정한 맛에 따라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가늠도 안되지만, 그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참맛'이지.


난 그런 순간이 좋다. 아이스크림을 정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까지. 입에 들어가면 어떤 맛일지. 이번엔 원 없이 먹어볼 수 있을지. 그런 순간을 그려보곤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