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경고 + 군 복무 미루기 + 대학원 진학 실패
내 대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은 2.09 정도로 기억한다. 그다음 학기엔 2.0도 넘기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았다. 대학생 1학년 때 학과생 127명 중 126등으로 마치면 사실 대학을 그만두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1학년이 끝나고 자퇴를 하려고 했으나 자퇴하지 못했다. 자퇴 대신 휴학을 택했고, 다시 도전해보겠다며 복학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지금까지 후회한다.
내 최종 성적은 어땠을까? 부끄럽게도 학점 3.0을 조금 넘긴 수준이었다. 그럴 거면 대학은 왜 다녔나 싶을 정도로 낮은 성적이다. 성적만 낮았을까? 대인관계도 제대로 맺지 못했다. 학과 생활도 거의 하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을 주로 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아리는 굉장히 얕은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학과가 다르니 만날 일도 적고,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다.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제한적이다. 동아리방 이외에서 만날 이유도 적다. 결국 대학교에 있으면서 나는 건진 게 거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대학 시절을 잘못 보낸 사람들과 공통점이 많다. 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은 형편없고, 대학에서 관계를 넓히지도 못했다. 그 큰돈을 내고, 그 귀중한 20대 초중반을 써서 얻은 것이 없다.
그 이후에 나는 무척 괴로웠다. 미래는 어둠 그 자체였다. 졸업할 때까지 군대도 안 갔고, 취업할 곳도 없었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도피처로 잠깐 대학원에 인턴 연구원으로 들어가서 대학원을 준비해보기도 했지만,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아니 열심히 할 수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어울리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졸업 후 반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새 시작을 준비했다. 항상 해보고 싶었던 프로그래밍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자. 그렇게 다짐하고 밑바닥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다른 글에서 자주 이야기했지만 처음에 C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이후 자바, 안드로이드, PHP, 클라우드와 데이터베이스, SQL 등을 미친 듯이 공부했다. 대학교 학부시절에 배우던 프로그래밍 수업은 하나도 재미없었는데 내가 선택한 길이 되니 미친 듯 공부해도 그다지 지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시골의 고향집에서 아침부터 새벽까지 방에 틀여 박혀 공부하고, 코드를 썼다.
2달 정도 공부만 하다 보니 돈이 다 떨어져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코드를 더 쓰고, 공부하고 싶어서 피시방에서 일하기로 했다. 컴퓨터를 쓸 수 있고, 혼자서 카운터를 보는 곳이었다. 덕분에 코드는 조금 볼 시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쉬워진 건 아니었다. 인스턴트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답답한 공기가 가득 찬 지하의 피시방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집에 오면, 코드를 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코드를 써야 했고, 계속 공부해야 했다. 나는 4년을 버린 것과 같으니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8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인생 첫 모바일 게임을 만들었다. 결제 서비스를 위해 사업자를 내고, 세금을 알아보고, 지갑 바닥이 긁힐 만큼 긁어 앱을 출시했다. 하지만 그 앱은 출시 1일 만에 망했다. 원인은 구조적으로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작동을 해보니 그동안 무시했던 수많은 문제들을 한눈에 보게 됐다. 그뿐 아니라 비용이 감당할 수 없었다. 사용자들이 결제를 하기까지 나는 서버와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는 돈을 감당해야 했는데 구조적으로 비용이 커지는 것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나는 출시된 앱을 바로 내린 후에 1주 정도 크게 좌절해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에 갇힌 느낌이었다. 나는 곧 있으면 군대에 가야 했고, 시도했던 앱은 완전히 고치지 않는 한 재출시가 불가능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내 인생을 후회했다. 도대체 무얼 위해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을 간 건지. 대학에서 성적을 못 받을 거라면 왜 빨리 포기하지 않았는지. 왜 부모님의 소중한 돈과 내 인생을 무의미하게 버린 건지 자책했다.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나는 내 패배를 가족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 부모님은 언제나처럼 날 믿어주고 계셨고, 바보마냥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래서 더 강해지기로 했다. 이제는 "비용을 고려한 구조, 감당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 성공하겠다."라 다짐했다.
이후에 내가 집중한 건 '웹'이다. 웹은 상대적으로 모바일 앱에 비해 제작이 빠르고, 총비용도 적게 제작할 수 있다. 테스트가 더 쉽고, 가볍다. 이번엔 웹 프로그래밍의 밑바닥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2016년 1월의 일이다.
나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단 3개월 만에 작지만 내가 원하는 기능을 구현한 웹서비스를 만들게 됐고, 그것이 싱가포르의 투자자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 나는 링크드인에 나를 루아흐(당시 사업자 이름) 대표라 기록해뒀었다. 한국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던 싱가포르 투자자는 나에게 연락을 해왔고 나는 제품을 소개할 수 있었다. 투자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투자는 실패했다. 이유는 내가 2개월 후에 군 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서 어떻게 살았을까? 군 복무를 하면서도 나는 내 서비스를 만들고, 내 브랜딩을 해야 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내 제품도 알릴 수 있었다. 물론 군인은 군대 이외의 수익을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수익성이 있은 서비스를 만들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료 서비스를 제작하고, 이것을 제대할 때까지 계속 발전시킬 생각을 했다. 그게 에어데스크다.
나는 군대에서 에어데스크를 만들었다. 정말 미친놈처럼 만들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함께 개발할 팀원을 구하고,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려고 별 짓을 다했다. 늦게 시작했으니 추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컴퓨터가 없으면 공책에 코딩했다. 휴가 때마다 프로그래밍을 했다. 24개월의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전역 후에 나는 에어데스크를 사업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했다. 전역 후 1달 정도 지난 7월 경 에어데스크 이름으로 사업자를 등록하고, 수익모델 제작을 시작했다. 첫 유료 모델인 에어데스크 프리미엄을 4개월 정도 후에 출시했다. 이를 위해서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결제 서비스를 연결하는 작업을 모두 직접 했다.
첫 '에어데스크 프리미엄'은 5만 원이 넘을 정도로 엄청 비쌌다. 하지만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기능은 추가하고, 가격을 계속 내렸다. 하지만 사용자들 에어데스크는 배경화면을 바꾸는 수준의 앱으로 쓰일 뿐 돈을 내면서 쓸만한 제품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익 모델을 다각화하기로 했다. 에어데스크 내에 프리마켓을 추가했다. 사람들이 콘텐츠를 올리면 판매도 할 수 있고, 플랫폼 수익도 거두는 3자 구조 형태의 수익 모델이다. 콘텐츠를 제작해줄 사람들이 필요해서 닥치는 대로 콜드 콜(Cold Call)을 보냈다.
콘텐츠를 소유한 작가들을 섭외하기 위해서 장밋빛 미래를 설명하기도 하고, 적용될 샘플을 제작해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을 했음에도 참여해준 작가는 한 명뿐이었다. 그걸 통해 번 돈도 고작 몇 천원이 끝이었다.
이 시기쯤 나는 에어데스크의 미래를 고민했다. 에어데스크를 더 끌고 가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혼자서 버티기엔 너무 고독하고 힘들었다. 벌써 혼자서 전쟁을 펼친 지 4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가 꿈꾸는 제품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사주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돈을 주지 않았다.
이후 나는 마지막 도전을 진행했다. 바로 '에어데스크 모바일 앱'이었다. 물론 이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 모바일 앱 제작은 견적을 산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총 제작 기간은 얼마일지, 리스크는 있는지, 팔리게 된다면 얼마나 벌 수 있을지. 2019년 1월부터 약 4개월 동안 모바일 앱 디자인을 비롯해, 제작에 필요한 프로그래밍 언어와 프레임워크를 공부했고, 이에 적합한 아키텍처를 구상했다. 그것을 위한 클라우드 비용과 내 시간, 노력 등을 모두 계산했다.
그러고 나서 포기했다.
이렇게 에어데스크 개발을 중단하고 나서 나는 스타트업 팀에 합류했다. 기존에 유료로 제공되던 기능도 모두 무료로 풀었다. 어차피 내가 쓰기 위해 만들었으니 돈이 더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에게 무료로 모든 기능을 풀었다.(에어데스크는 지금까지도 프리미엄이 무료다. 회원가입만 하고 로그인하면 적용된다.)
스타트업 팀에 합류할 때 나는 내 인생이 많이 달라진 걸 느꼈다. 대학을 졸업할 때 나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피시방에서 일하기 위해 면접을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할 곳을 찾으니 수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찾아왔다. 한 10~20명 정도 되는 대표들을 만났고, 그들 대부분이 나를 최고 기술 책임자인 CTO로 일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중 한 곳에서 1년 반 가까이 CTO로 일했고, 서비스의 모든 부분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다시 대표가 됐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지만 위치는 많이 다르게 말이다. 나이 서른에 다시 대표가 됐다.
단순히 회사 대표가 된 것뿐 아니라 많은 게 달라졌다. 지난 반 년정도 쓴 책이 4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 회사를 창업하기 전에 스카우트 제안도 수 없이 들어왔다. 이직해주면 1년 연봉에 가까운 돈을 준다는 곳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지난 6년의 시간은 이랬다. 2년은 군대에서, 2년은 시골집에서, 그리고 2년은 서울에서 각각 보냈다. 6년의 시간 중 5년 가까운 시간이 어둡고 차가웠다. 손에 쥐어진 것은 거의 없이 길고 외로운 싸움을 해왔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마치 쇠사슬에 묶인 죄수가 수영을 하는 것처럼. 나는 가라앉는 물속에 있는 사람처럼 쉼 없이 헤엄쳐야 했다.
나는 반년 전부터 서울 역삼동에서 살고 있다. 한 블록만 걸으면 강남대로와 강남역이 펼쳐져 있다. 빌딩이 숲처럼 펼쳐진 곳에서 일하고, 일거리를 주는 클라이언트분들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는 동네에 나가도 개 짖는 소리밖에 나지 않은 촌에서 수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늦었다면 달리면 된다. 조금 늦었으면 조금 더 뛰면 되고, 많이 늦었으면 많이 뛰면 된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뛰면 된다. 뛰면 따라잡을 수 있다. 도리어 늦었기 때문에, 방황했기 때문에 얻은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는다면 따라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