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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Feb 28. 2024

커피

2024. 2. 28.


아침부터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진행하는 사업 중 하나의 미팅을 위해서 컨설팅 그룹 사무실로 향했다. M&A 사업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하고, 해당 사업은 드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어서 H사 VIP 커뮤니티와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컨설팅 그룹의 K 대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물었다. 예상과 달리 큰 도움을 주긴 어렵다고 했다.


앞선 두 개의 이야기는 드롭되고, 이어진 세 번째 안건은 강력하고 훌륭했다. 고객에게는 선명한 이익을 제공했다. 프로바이더들은 1~2% 정도씩 얻는다. 도합 수수료는 10% 정도 될 것이었다. 환상적이었다. 곧장 이 사업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미팅 일정을 잡았다.


다음 일정을 위한 장소로 향했다. 점심시간이었기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소식(小食)을 하다 보니 주문한 국밥을 다 먹지 못했다. 양이 확실히 줄었다.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인근의 커피숍에 들렀다. 2년 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던 독특한 곳이었다. 거대한 나무 문이 눈에 띄는 곳이다.


힙한 공간답게 세련된 분들이 각자 노트북을 하며 작업했다. 안 쪽 테이블에선 대화를 나누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아마도 1층 커피숍을 제외한 층은 모두 사무실이었나 보다. 멍하니 인터넷을 하며 쉬었다. 쉼을 끝내고 다음 일정을 위한 장소로 이동했으나 정작 장소는 문이 잠겨있었다. 꽝이었다.


꽝이었지만 그 다음 일정을 위해 이동해야 했다. 법인 변경 사항을 위해 날인이 필요했다. 인감증명서를 떼고 도장을 챙겨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대표를 만나 또다시 커피를 한 잔 하러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여러 투자 전략과 사업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상황은 비슷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고객만 없었더라도 지금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여유를 가지고 일하고 있었을 텐데. 바닥부터 올라가는 B2B 사업은 상대방 기업에 대한 신뢰나 시장 변화에 대한 리스크 감수를 할 수밖에 없다.


B2B를 안 해본 이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 잘 모를 것이다. 자영업자가 하는 B2C에서 리스크는 창업한 가게가 장사가 안돼서 망할 가능성 정도라면, 기업 거래에서의 리스크는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위험이 따른다. 결국 위험한 게임을 하기에 보상도 압도적으로 큰 것이고, 동시에 잃어야 할 때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거대한 시장에서 시장 경제의 각각의 파츠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대표들도 마찬가지지만 정작 그 일을 시작할 때는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고 시작하는 것 같다. 자신의 롤에 대한 온톨로지를 정확히 모른다.



첫 창업을 시작했을 당시 1인 개발자로 먹고사는 게임 개발사 정도를 목표가 전부였다. 그러나 여러 풍파를 겪으며 대표라는 위치는 위아래로 요동쳤다. 지금이야 유야무야 된 이야기지만 재작년 버킹햄에서 투자설명회만 하더라도 나는 해당 회사의 비전을 믿고 있었다. 크립토 시장의 미래를 확신했다. 위험한 게임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과거에 있었던 해프닝으로 끝났다. 거래소 한국 지사장 소리도 이제는 안 한 지 오래다.


재밌게도 시장의 안쪽에서 깊은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생산하고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변색된 정보들이 판을 친다. 나는 그런 정보의 가치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커피잔에 담긴 정보. 술잔에 담긴 정보.


나는 술잔에 담긴 정보는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두 잔 마시며 나눈 이야기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다. 한 잔은 디카페인으로 마셨지만 다른 한 잔의 커피 때문일까. 1시간 정도 눈을 감고 일어나니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돼서야 라이브 방송을 켜고 글을 적었다.



집에 돌아와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은 지헤로운 자들의 손에 있다. 지혜로운 이들은 피해를 만들지 않고도, 누군가의 희생 없이도 가치를 창출한다. 조용하고 단단한 부가 성벽의 벽돌이 되어 쌓인다. 켜켜이 쌓인 지혜와 지식의 성. 한 남자의 세상을 견고하게 구성하고, 우리는 견고함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체감하게 된다.


지혜로운 사람의 대화는 향기로운 커피와 같았다.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고, 현명한 길로 인도한다. 흐릿한 영혼을 각성하게 한다. 잊고 있던 영감을 이끌어낸다. 지혜로운 이들은 세상에 숨어있고, 그들의 지혜를 발견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기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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