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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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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Jul 06. 2024

눈 덮인 성

2024. 7. 6.

"그날 우리가 있던 곳은 눈의 감옥이었다. 그 순간 우린 차라리 그곳에 영원히 고립되는 것이 행복할 것 같았다. 아니,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 박 영,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Spray Valley Provincial Park - Kananaskis Country, Alberta, Canada


전쟁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사투가 된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너는 왜 이렇게 긴장해 있어? 좀 쉬엄쉬엄 해. 여유를 찾아." 이런 말을 하는 놈이 있다면 미친놈이다. 우리가 다 같은 세상에서 같은 상황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가? 당신과 내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모두가 다르다. 같은 나라에서도 다르고, 같은 사회에서도 다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한 없이 이기적이라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있어도, 내가 편안하면 아무리 거대한 전쟁이라도 나의 공포라 느끼지 못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1년을 넘겨 지나가고 있어도 먼 나라 이야기. 이스라엘에서 아이언 돔으로도 못 막는 폭격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도 남의 이야기일 뿐.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아니. 당장 서울에서 가장 부유한 부촌 한남동과 그 옆의 빈자들이 머무는 옥탑방과 반지하는 먼 차이가 없다. 같은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어 살고 있으면서 어떻게 같은 삶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Kyiv, Ukraine


그렇기에 무지한 것은 행복하다. 자신이 받은 축복의 값에 대해 무지한 인간은 그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인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자신이 얼마나 잘났고, 축복받았는지만 누리며 살기에 바쁘기에 절대 주변을 볼 수 없다. 


나는 수많은 회장들과 대표들과 성공한 인물들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딱히 존경의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들을 존경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삶은 파묻힌 눈더미처럼, 자신을 둘러싼 온갖 휘황찬란한 축복의 빛에 둘러싸여 자신의 성공에 도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는 언제나 자신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 이상의 인간이 되는 인물은 없었다.


그들이 만든 것은 거대한 집과 호화스러운 저택이 아니다. 세상의 실체를 감추는 감옥을 스스로 짓고,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 수십억, 수백억의 감옥을 짓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성공을 말하며 돈과 성공의 향기로 사람들을 이끄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다. 


Chernihiv, Chernihiv Oblast, Ukraine

만약 신이 있다면 그의 삶에 주어진 축복과 그 축복의 결과물로 이 세상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를 재는 추가 있기를 바란다. 이 세상이 정의롭고 공정하지 못할지라도 이 세상이 아닌 그곳에서는 공정한 저울로 판별해 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원한다.


다 똑같을 뿐이다. 큰 일을 꾸미는 이들도 결국은 자신을 위함이고, 작은 일로 살아남으려는 이들도 자신을 위함이다. 우선순위가 자기 자신이 1위가 아닌 인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상하게 여기기도 한다. '왜 저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남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인가?' 마치 동물원에서 보는 동물들처럼 먼발치에서 신기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 


이 세상. 아무 쓸모없는 여정. 이 의미 없는 여정에서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람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 너무나도 평온하게 살아서 세상의 달콤함에 취해버린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도 살리고 싶다. 서서히 살아있는 송장처럼 죽어가는 사람들. 이 짧은 인생에서 살아갈 작은 이유가 되어주고 싶다. 


Kyiv, Ukraine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아닌 분노로 가득 찬 인간이다. 아직까지는 분노를 때로는 정치를 향해서, 여론조작을 하는 이들을 향해서, 권력층과 지배계층을 향해서, 여론을 향해서, 사기를 일삼는 개인을 향해서, 온갖 방향으로 분노해 왔다. 화가 났었다. 주변에서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상관도 안 하고, 마른오징어를 쥐어짜듯 고혈을 뽑아먹는 이들을 보며 처단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해 봐도 관심 없었다. 그것이 사업이 됐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착취당하는 것도 하나의 일상이 된 사람들. 세뇌를 오랫동안 받다 보니 세뇌받은 세상과 가치관이 기준이 된 사람들. 모두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방관자.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그 어떤 성도 필요가 없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높은 탑을 쌓을 필요도 없고, 그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천국 생활이라 자위할 필요도 없다. 


살리고 싶다. 살릴 수만 있다면 많이 살리고 싶다. 1명을 살리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 10명, 100명, 1000명,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살리고 싶다. 나의 분노의 방향이 가야 할 곳은 세상의 쓰레기를 불태우는 것이 아닌 무너진 땅과 사람들을 다시 세우는 것. 내 삶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사야 58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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