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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Oct 23. 2024

녹턴

2024. 9. 3.

Nocturne No. 13 in B Minor, Op. 119 (1921) · Brad Mehldau


내가 사람을 보는 기준 중 하나는 당신과 내가 똑같은 나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아무런 업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새 학교, 새 학년에서 만난 같은 반 친구라면 어떻겠는가. 그때도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인가.


과거의 나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바뀌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0년이 지나도 10년 전의 모습대로 살고 있었고, 20년이 지나도 20년 전의 그 모습과 전혀 달라지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 지독하게도 바뀌지 않았고, 그 모습은 학창 시절이나 성인이 된 모습이나 별 차이가 없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애벌레에서 나비로 바뀌는 것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꽃 피운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찬란하게 말이다. 꽃이 피기 위해선 씨앗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허락된 피움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은 과거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더 단단해지고, 또는 더 타협하고, 적당히 시류에 어울리며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작은 사회가 바로 학교라면 학교에서 일어나는 온갖 폭력이야 말로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원리 같다. 폭력의 주동자. 폭력에 조력자. 폭력에 침묵하는 자. 폭력을 당하는 자. 폭력을 당하면서도 개선되지 않는 자. 폭력 속에서 칼을 품는 자.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었는가. 이 사회에는 폭력에 주동자와 가담자가 몇 퍼센트나 될 거라 생각하는가. 그들은 죗값을 언제 치렀을까. 대한민국의 감옥은 그렇게 넓지 않아서 이들을 다 잡아넣으려면 인구의 몇 퍼센트를 가둬야 할까. 피해자는 용서한 적이 없는데 묵인으로 용납된 범죄들을 마주하면 그들과 함께 기생하는 인간의 숫자는 얼마나 많을까.


베트맨이나 비질란테와 같은 인물들을 그리는 묘사를 보다 보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사회는 자정작용이 되지 않고, 경찰서의 경찰들은 정의감보다는 하루하루의 일과를 처리하는 공무원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은 비리 경찰들이 생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지는 어두운 일에 손을 담그면 담글수록 깨닫게 된다.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고 먹고산다. 사회를 지키면서 동시에 파괴하며 말이다. 푼돈을 손에 쥐기 위해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것들이 어리석었던 것 같다. 원래 그래왔고, 원래도 그토록 쓰레기 같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구나. 피해를 입어도 나와 관련이 없으니 침묵하는 어른들이 가득했었고, 말로는 정의를 떠들지만 그 정의는 언제나 내가 피해를 입었을 때만 발동되는 선택적 정의였다.


그래서일까. 미국에서는 매년 한 번쯤은 무차별 총기 난사가 발생하곤 한다.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한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총기를 든다. 그 과정에서 나를 괴롭히지 않았어도 죽인다. 그들이 무차별 난사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고, 모두 가해자 편에서 침묵하거나 동조하며 방관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싶다. 세상의 어떤 쓰레기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왔을까. 하나하나 적어두게 된다. 무능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사이코패스적인 인간들이 사회 각층에 얼마나 많았는지.


그들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진실이다. 극단적 진실. 그들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알기에 절대 극단적으로 진실할 수 없다. 수치스러운 길을 이미 걸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멀리 있는 지옥문이 열릴 것이라 모두가 바라겠지만 지옥은 있겠는가. 이 고통 끝에 평화는 있겠는가. 아무도 가본 적이 없으니 알 수도 없는 길. 안다고 말하면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만든 길.


어쩌면 그게 이 게임의 룰일지도 몰라. 아무런 이유 없이 싸워야 하며, 설득해야 하고,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 사회. 웃기는 일이 아닐지 몰라. 상점에 파는 이 칼이 누군가의 목을 향할 것이라는 걸 상점 주인은 알 방법이 없지.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팔고, 또 팔며 동조하고, 침묵한다.


그래 어쩌면 나는 80% 정도를 적으로 돌렸을지 몰라. 학교에서도 똑같았지. 아무리 부당한 일이 일어나도 80% 정도는 정글 속 벌레들처럼 가만히 숨어서 자신이 먹잇감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침묵하지. 그래 침묵은 할 수 있어. 하지만 20년 이상 침묵하는 건 쪽팔린 일이지 않아? 20년 이상 병신으로 사는 건 쪽팔린 일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고들 있다. 다 큰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침묵하고. 여전히 쥐구멍을 찾아다니니 사람과 쥐새끼를 구분할 수가 없다.


베트맨은 고담을 살려보겠다고 했지만 살리지 못했고. 폭력으로 폭력을 잡겠다고 하는 것도 불가능했었고. 그저 세상은 황금 비율처럼 가해자와 방관자. 피해자가 농도를 맞추어 살고 있구나. 가장 밑바닥부터 가장 깨끗한 윗부분까지. 황금 비율로 돌아가는 세상이구나. 싶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그저 자정이 되려면 죗값만 치러진다면. 너무 늦지 않게.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가 이야. 그리고 그 죗값은 적어도 피해를 입힌 것보다는 가볍지 않아야겠지. 눈에는 눈은 말이 안 돼. 피해자가 원치 않게 눈을 잃어버렸는데 똑같이 눈을 빼앗아간다니. 하나의 눈에는 두 개의 눈으로. 하나의 팔에는 두 개의 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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