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0.
초록빛으로 물든 차가운 바닥.
깨끗하게 정돈된 바닥에서는 과할 정도로 깨끗해서일까. 락스 냄새가 올라오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모든 게 끝나는구나. 길었던 삶인지 짧았던 삶인지.
사형수는 전기의자에 앉아 마지막 날숨을 내뱉는다.
깨끗한 바닥에는 사형수가 남긴 잔여물이 흐르고,
또 다음 사형수를 위해 청소부는 그곳을 닦는다.
깨끗하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끝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질주하듯 내지르던 일들의 마지막 순간에 도착했을 때 그 결과물을 보기보다는 한 걸음 주저하며, 그저 망상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안타깝게도 꿈꾸던 삶의 모습도, 완성될 줄 알았던 마지막 단추도 마지막으로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긋지긋함 속에서. 반복되는 엔딩 크리딧을 보면서. 어쩌면 많이 지쳐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내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지쳐버렸을지도.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잡지만 남기지 못한 것처럼. 지지부진한 싸움을 하면서 얻어낸 전리품의 살점은 오고 가는 이들의 일용할 밥그릇에 담겨버렸다. 나도 그렇게 노인이 되어가는 걸까. 거대한 청새치를 상어들에게 나누어주며. 뼈만 남은 영광을 주워보려는 것일까.
사람이 포기하면 담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가능하다. 그렇기에 포르노를 찍어 큰돈을 버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을 헐값의 광대로 팔아 살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마음에 없는 말과 마시기 싫은 술을 마시며 몸을 섞어 돈을 벌기도 한다. 더 많이 포기하면 더 많은 길이 열리지만 그 길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거대한 청새치를 노리며 사냥꾼들과 다녔으나 그들은 배신자였고. 배신자들을 추적하며 내가 모은 식량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그들은 게을렀다. 힘들게 모은 삶의 삯은 오고 가는 상어들과 부랑자들을 위해 쓰였으니 나에게 남은 뼛조각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남은 살점을 빼앗아 먹은 상어를 쫓아 상어 고기로 배를 채워야 할까. 아니면 배신자 무리인 사냥꾼들의 금고를 찾아내 도둑질을 해야 할까. 아니면 게으르고 무능한 밥벌레들을 탓할까.
죽음도 인간이 포기할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념을 위해 죽기도 하고, 나라를 위해 죽기도 한다. 가족을 위해 죽기도 하고. 죽음보다 비싼 값의 인생을 바치기도 한다. 참으로 인간의 위대함은 업적이 아닌 그의 신념에 담긴다는 말을 나는 간절히 믿고 있다.
종종 사람들은 모순을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 속에 살고 있다. 무엇이 대단한 사람인가. 뮤직비디오에서 세상의 신이 된 것처럼 쇼를 하는 아티스트들이 위대한 이들인가. 듣기 좋은 노래와 쇼를 보여주어 내 기분을 좋게 한 존재라면 위대한 존재이고, 나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는 그보다 못한 존재일까. 진정으로 값을 지불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세상은 거꾸로 돌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영웅은 잊어버리고, 온갖 딴따라들이나 추앙하는 기괴한 세상에서 살게 됐다. 1년에 두어 번이나 영웅들을 위한 생각을 할까.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곧 나의 세상. 사람들의 세상은 즐거움과 재미,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가치의 주춧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 기분 좋게 해주는 이들이 삶에서 가장 존경받을 이들이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되며, 그들을 동경하기에 화려한 삶을 뽐내는 이들의 꽁무니와 인스타그램이나 염탐하며 가치관을 만든다.
거꾸로 된 세상. 병신들로 가득한 것만 같다. 존경할 사람이 이토록 없다니.
삶의 이유. 그 이유가 없으니 삶의 결과도 선명한 것이 없었다. 10년의 세월을 통해 이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20년의 세월은? 30년은? 시간이 지나도 남길 유산도 지켜낼 신념도 없었다. 의미 있는 것을 향한 몸부림을 가진 인물이 이토록 없다니. 거짓말이나 일삼으며 돈 몇 푼을 줍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가득하니, 그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도 전혀 그 이상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는 그들의 참담함을 보면 볼수록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생산하면 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따위를 이야기하곤 하는데. 이미 인간의 가치는 숫자로 형편 없어지는 게 증명됐다. 시간이 지나도 인간의 가치는 올라가지 않고, 낮아져 왔다. 예나 지금이나 정해진 숫자 몇 개로 이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원한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가격표의 숫자는 도통 올라가지 않는다.
올라가지 않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에 가깝겠지. 숫자는 하찮아졌고, 인간 역시 하찮아졌고, 똑같은 돈을 주고도 할 사람이 많아졌으니 값은 떨어져야겠지. 뭐라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지. 가치는 없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지켜야 할 신념도 지켜야 할 사랑도 없는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대에서.
배신자들의 잔과 물속의 상어 떼를 바라보며 나는 내 효용성을 느끼곤 한다. 입 안에 피가 차면 입안 가득 피의 맛을 느낄 수 있고, 충분히 많은 피가 눅진하게 향을 풍기면 피 비린내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내 눈을 열어준 이들이 먼 훗날 볼 초록빛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위하여. 거꾸로 된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 시스템을 리셋하려는 이들을 위하여. 웃기는 일이야. 뭐 하러 리셋을 하나.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그럼에도 청소는 해야겠지. 다음 전기의자에 앉을 사형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