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7.
나이를 먹어가는 것.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
나이를 먹다 보면 사람은 강해지기도 하지만 조금씩 약해진다. 체력은 떨어지고, 잔병이 늘어간다. 피부는 쳐진다. 머리는 빠진다. 이가 약해진다. 그렇게 노화하고, 사람은 죽는다.
돈이 없어도 사람은 죽는다. 빌어먹지 않는 한 물이 없으면 1주 이내에 사망. 음식이 없으면 4~6주 이내에 사망한다.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전 세계 기준에서는 큰 수준이다. 심각한 식량 위기에 놓인 사람의 숫자는 2억 8,200만 명. 대한민국 5개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은 시시각각 배고픔으로 죽는다.
피할 수 없는 노화와 피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두려워하는 미래가 도래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 미래가 뻔히 보이기 때문에 그 미래에서 숨는 것이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하면서. '생각해 봤자 답도 없잖아.' '에라 모르겠다.' 같은 될 대로 되라고 자신을 내동댕이 친다. 스스로가 버린 나를 챙겨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기 자신도 버린 사람을 누가 귀하게 대해주겠는가.
준비하지 않은 삶의 결과는 마치 방학 내내 놀고 나서 숙제 검사를 하는 기분과 같을 것이다. 아무런 숙제를 하지 않았으니 선생님께 혼날 두려움 속에 하루를 보낸다. 그 두려움이면 숙제를 하는 게 나을 텐데도 숙제를 하기보다는 선생님께 혼나는 걸 택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냥 혼나면 끝 아니야 하면서. 하지만 반대를 생각하지 못한다.
나이를 먹어서도 똑같은 마인드로 살 수 있다. 혼나고 말면 되지 뭐. 그냥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 운 좋게 되겠지 뭐. 아니. 태도는 사람의 몸에 담기고 자신의 삶에 무책임한 인간은 그 어떤 일에도 책임감이 없다. 나는 종종 망가진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넉넉한 보수에 쉬운 일. 배우려고 한다면 얼마든 배울 수 있는 일. 하지만 망가진 인간들은 기회를 기회로 보지 않는다. 로또 당첨 정도를 제외하고 그들이 만족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 어떤 것에서도 책임지지 않고 살아왔으니 자신의 인생이 시궁창 속에 도착했음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삶이 됐다.
안타깝게도 시궁창 속 삶은 시궁창이 익숙해져 가면서 더욱 문제가 된다. '이 정도 냄새는 괜찮지 않아?' '이 정도 쓰레기는 괜찮지 않아?'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논리를 합당화 하는 것이다. 절대 괜찮을 수 없음에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그곳이 정착지가 된다. 시궁창에 어울리는 존재가 뭐가 있을까. 시궁창 쥐 말고 더 있겠는가.
노숙인 분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업의 어려움을 몇몇 자료를 통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식사와 잠자리, 그리고 일자리를 제공해 주어도 다시 노숙인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식주 모두를 제공받아도 사회 구성원으로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노숙인으로 살면서 점점 더 망가지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 부적응이 쌓여가면서 결과적으로 그 어떤 기회를 받아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추락한 것이다. 추락한 몸과 정신.
모든 것을 지원받아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이들이 있고, 모든 것을 지원받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시궁창을 벗어나려는 이들이 있다. 자유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에게는 가끔씩 천운이 따라주고,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시궁창 속 정신을 가진 이들에게는 조용히 하나씩 빼앗아 간다. 그렇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빼앗기는 자와 얻는 자가 나뉘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더 없어지게 된다.
가난에는 이자가 있다. 병원에 바로 가서 치료받으면 저렴한 질병도 가난해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면 큰 병이 된다. 직장과 멀리 후미진 곳에 살고 있다면 출퇴근 시간과 교통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매일 2시간 ~ 3시간. 어쩌면 그 이상을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실려 이동하는데 쓰게 된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그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다. 왜 일어나는가? 내가 그 길을 택했으니 일어난다.
많은 이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쓸 에너지보다 변명하는데 에너지를 더 많이 쓴다. 그렇기에 변명으로 매일 매 순간 자신의 상황과 문제를 합리화한다. 개 같은 회사에 출퇴근하면서도 이직을 한다는 근본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다. 이직이라는 답 자체도 미봉책이라며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사업을 하라고 하면 사업 또한 변명을 하며 사업의 단점을 말한다. 그렇게 온갖 단점과 변명들만 하는 모든 인간들은 언제나 놀랍게도 '아무것도 안 하고 현상 유지나 하자.'라는 결론을 가진다. 그들이 변명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바꿀 에너지도 없기에 변명을 만들고, 변명을 만들어야만 자신의 게으름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웃긴 일이지만 사실 그들이 게을러서 시궁창 속에 머물러있든 말든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은 없다. 자신의 인생을 최저 수준의 인생으로 남겠다고 하는 자발적 패배자 마인드인 사람들을 구제해 줄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 선택한 길.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선택을 스스로 했으니 선택한 미래에 대한 보상 역시 그들의 것이다.
지난 글에서처럼 나는 마지막으로 살려보고 싶었던 사람이 이제 사라졌으니 더 이상 그들을 향한 에너지를 쓸 이유가 없어졌다. 내가 가진 신념 중 하나는 비록 내가 강자가 아니더라도, 비록 내가 귀족이 아니더라도, 도울 수 있는 이들을 돕자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도움을 주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 없어도 너무 없다. 스스로 시궁창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주겠는가. 오늘도 최저시급을 받고, 남은 시간엔 멍 때리면서 스마트폰, 인스타그램이나 뒤적거리다가 수다 떨고 끝나는 하루를 원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줄까.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도와줄 필요도 없었다.
어찌 보면 나 역시 결말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망 없는 이들을 도와주면서 희망을 가졌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그랬기에 다시 주변을 돌보지 않고 내 길에만 전념하자. 비참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지 말자. 사람이 바뀌는 일은 백 명 중 1명쯤 되지 않겠는가. '99명이 모두 배신할 때 받을 괴로움보다 바뀐 한 명에 투자할 자신이 있으면 그때서야 돕자.'라고 마음을 정하게 됐다.
깊은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 나는 내 길을 가자. 내가 준비해야 할 선명한 미래를 위해서 다시 모든 시간을 쏟아야 할 시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