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5.
만약 당신이 노예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답은 바로 '바보 되기'에 있다.
당신을 구매한 주인의 입장에서는 당신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부여할 것이다. 당신의 목표는 이 상황에서 너무 과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 폭행이나 신체의 일부를 소실당할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정부터 바뀌어야 한다. 복종의 표정을 짓는다.
'저는 주인님을 공격하거나 반항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가진 몇 가지 표정을 제거해야 한다. 바로 화를 내거나 분노할 때 나타나는 표정부터 없애야 한다. 반대로 일 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항상 웃고 있거나 미소를 지어야 한다. 나에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을 당해도 웃는 표정이 패시브가 되어야 한다.
표정을 고친 후에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당신이 노예로 사는 이상 주인이 부여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인이 시키는 일을 무한정하다간 당신은 골병이 들어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을 하되 수동적으로 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바보처럼 행동한다. 계속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없이 주인이 생각할 때 '에휴 저 놈은 저것만 하는 것도 용하다.' 하며 포기하게 만든다.
이러한 노예 전략은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주인이 노예를 더 심하게 탄압하는 구조가 된다면 다른 전략을 택하게 된다. 바로 계층을 만들어 살아남는 방식이다. 노예라는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보다 더 아랫사람을 만들어 명령하는 것이다. 이로써 내 체력과 정신을 보호하고, 괴로운 일을 맡길 노예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착취의 구조를 통해 자신의 노예 생활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 다만 맨 아래 계층의 노예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주는 일에 반감을 하지고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통제할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웃기지 않은가. 노예 전략의 2번째 접근법은 또 다른 노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노예가 또 다른 노예를 두어 자신의 고통을 해소한다.
위의 2가지 노예 전략은 사실 둘 다 같은 노예 전략이 아니다. 첫 번째는 노예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상황에 만족하면서 생존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두 번째는 노예를 새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주인으로 노예를 부리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고민으로 바뀐 것이다. 주체가 노예 자신일지라도 자신보다 아래의 노예를 둔다면 주인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2번째 전략이 주인 전략이 아닌 것은 그도 역시 노예이기 때문이다. 노예로 살면서 노예를 둔다고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결국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인 주인 전략도 내가 섬길 주인이 없을 때에 온전해지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노예에 해당한다. 삶의 노예이고, 돈의 노예이며, 권력의 노예이다. 그러기 위해서 똑같은 노예의 처지이지만 노예 아래에 노예를 두는 것을 택하는 일. 또는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주인처럼 보이는 노예도 있을 수 있다. 섬길 이가 아무도 없어 보이는 왕이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왕은 두렵다. 왕은 삶의 노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 호위대를 만들고, 24시간 자신을 수호하는 이들을 곁에 두지만 그들이 배신한다면 한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적으로 왕은 매 순간 암살의 위험을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먹는 음식에 독이 있지 않은지. 잠을 잘 때면 칼이 목에 들어오지 않을지. 함께 눕는 여인이 앙심을 품은 자객일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설령 왕일지라도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장은 돈의 노예이다. 사업이 왜 힘들까. 나갈 돈은 정해져 있고, 들어올 돈은 기약이 없다. 돈이 제 때 나가지 않으면 직원은 떠나가고, 고객을 잃어버린다. 직원이 노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노예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노예로 살 곳을 정하지 않는다. 돈의 명령을 따라 살기 때문에 시장이 사장에게 "이것을 만들어라" 하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품을 만들어야 하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처럼 노예 전략은 사실 뻔한 내용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다. 사람은 모두 현재의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메타인지가 잘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놓인 상황에 대해서 노예 전략은 어떤 위치인지 알려준다. 만약 내가 서두에 이야기한 대로 항상 방실방실 웃으며 인간에게 아무런 공격 의지가 없는 순한 개처럼 살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공격성을 상실하고 돈을 벌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장이라면 시장이라는 주인의 명령 속에서 노예인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주인인 시장은 똑같은 명령을 나를 비롯한 수백, 수천 명의 노예들에게 보낸다. "야 맛있는 거 하나 만들어봐." 그러면 이 명을 하달받은 노예들은 맛있는 걸 대접하기 위해 각자 상을 펼친다. 노예들끼리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신 자유주의는 이 과정에서 내가 설명한 시장이라는 주체가 곧 대중이 되는데, 대중을 향한 노예의 관계가 되는 게 자본가이고, 자본가는 시장을 충족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자본이라는 재화를 통해 노동력을 확보한다. 결국 먹이사슬의 순환이 생긴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먹는 모습으로 자본, 시장, 노동자는 그렇게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인 관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나.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나는 돈의 노예이면서 삶의 노예이다. 이것 없이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 내가 스스로 삶을 끊어버려 삶의 노예를 벗어나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삶의 노예일 것이고, 내가 무한대로 돈을 가지지 않는 한 여전히 돈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삶의 명령과 돈의 명령 속에서 나는 그것을 받드는 노예로 산다. 주인에게 반기를 들지 않으면서 주인의 명령을 따라 순종적인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인 몰래 노예를 두어 그들을 통제하며 주인을 섬길 것인가. 그것은 플레이어의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