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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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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Oct 22. 2024

검은 셔츠와 크롬 하츠

2024. 10. 22.

I’m an independent man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검은 셔츠를 입었다. 크롬 하츠 반지와 어디서 샀는지 알기 힘든 팔찌가 인상적이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카오산 로드에서 샀을 것이다. 뻔하지 항상 그곳을 좋아했으니. 한 번은 그녀의 크롬 하츠가 멋져 보여서 크롬 하츠로 향하기도 했다. 반지는 문제가 없었다. 반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손가락이 문제였다.


검은색은 감추는 색이 아니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색이다. 검은 셔츠는 그녀의 하얀 얼굴과 손을 더 하얗게 보여주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여정은 꽤 즐거웠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100%의 비즈니스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서로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달랐기에 더 선명했던 것 같다.


나와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외모의 힘을 선명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색계라고 해야겠지. 그녀의 커리어는 아주 선명했다.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빅 4 컨설팅 펌에서 근무하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런던으로 향했다. 한국에는 가끔 들어왔었다. 인천 공항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뭘 바라고 런던에 가있는 것인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15살쯤 많은 아저씨를 잘 구슬려 써먹고 있다고 했다. 그녀다웠다.


서로에게 전달할 이야기는 모두 마치고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크롬 하츠 매장을 다시 가봐야 하나.' 어울리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이라도 스타일이 부럽긴 했다. 검은 셔츠와 반짝이는 주얼리. 하지만 이내 단념하고 나는 내 스타일 대로, 내 길로 향했다.


선선한 공기는 어느덧 차가운 공기로 얼어붙어있었고, 그날은 무척이나 많은 눈이 내렸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천공항의 야외 주차장에 처음 주차를 했을 때이자 가장 후회했던 날이었다. 모든 차가 머리엔 하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30분이 넘게 광활한 주차장을 헤매었다. 옷은 또 왜 이리 얇게 입었는지. 동남아를 다녀왔으니 그랬다지만 참 나도 대책 없지.


차를 찾아 서울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피곤함과 에너지가 공존한다. 아침 8시를 지나며 서울로 향하는 길에는 강렬한 태양이 눈앞에 있다. 조금만 늦으면 막히기 시작하는 차들과 도통 빠져나갈 기미가 없는 이 길을 멍하니 보면서 유튜브에 의존한다.


한 번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로비스트를 픽업해야 했다. 그는 한국의 H그룹과 큰 거래를 성사시킨 인물이었지만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보다 5살쯤 많았다. 말레이시아인이면서 로비스트로 전 세계를 누비는 그와 2시간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나눈 대화는 무척 즐거웠다. 그는 2~3살 위의 대학 선배와 회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둘 다 첫 회사였고 그 첫 회사를 수 조원의 거래도 성사시키는 로비스트가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내냐는 질문에 그는 아마도 비행기에서 보낼 것 같다며 웃어넘겼다. 1년의 1/3은 비행기에서 보내는 것 같다며 괴로움을 호소했다.


로비스트 친구를 두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로비스트라는 직업 자체가 없으니 더욱 그렇겠지. 그렇게 그날은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새벽부터 픽업해서 서울로 데려오고, 늦은 시간까지 행사를 치르고, 저녁부터는 다시 일 이야기를 해야 했다. 에스프레소가 필요했다. 상당히 많은 카페인이 피에 섞여있어야 했다.


나는 그래서 항상 인천공항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탈출구 같기도 했다. 작년에 이사를 갈 고민을 할 때 송도를 깊게 생각해 봤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럼 적어도 입국하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해야 하는 고생은 안 해도 될 테니.


재밌게도 내가 예쁘게 생각했던 크롬하츠의 반지는 항상 가는 미용실에서도 볼 수 있었다. 몇 년째 방문 중인 미용실의 디자이너님도 생각해 보니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피부가 하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특권일까. 반지가 어울리는 손은 따로 있는 거겠지. 어디 가서 손이 못생겼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마디 사이에 살이 찐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머리를 깎으면서도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 반지는 크롬 하츠껀가요?"


런던으로 향한 그녀는 오늘 같은 우울한 하늘을 보내주었다. 런던은 서울만큼이나 우울한 공기가 감돈다. 그녀가 영국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곱상한 얼굴과 동양인이면서도 백인보다 하얀 얼굴로 또 어떤 일을 해낼 생각일까. 뜻하는 바는 다르지만 나는 그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인생의 멋은 자신에게 맞는 색과 반짝임을 찾기만 하면 된다. 어중간한 색은 섹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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