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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Oct 22. 2024

삼도천

2024. 10. 22.

그때는 돈이 없었다. 망자들이 건넌다는 강에 뱃삯은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급하게 입은 검은 양복. 늦여름에 입기엔 무척이나 더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떠나간 형제가 겪었을 고통에 비할 바도 안될 테니 말이다. 


초라한 죽음. 초라한 고요함. 인생이 이렇게 부질없었던 것일까. 사람의 목숨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종종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중요하다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평화 위에 올려진 것들 뿐이라고. 사람들은 영원할 것이라 믿는 땅과 집. 그리고 국가와 회사들까지도. 사람의 죽음처럼 국가의 죽음도 도래할 수 있고, 수만 명이 사살되는 와중에 개인의 존귀함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믿었다. 거대한 악을 찾고 찾다 보니. 그 거대한 악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고, 괴물의 눈동자와 손톱 마디마디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더럽고도 긴 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무엇도 믿지 말자. 그 누구도 믿지 말자. 검증되지 않은 믿음은 생사의 경계를 넘게 만들고, 돈 몇 푼에 팔아버린 양심으로 수백 명의 목숨이 파리보다 끔찍하게 산산조각 난다. 시체는 찾을 수가 없다. 애초에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살아있을 가능성도 없다. 그저 그렇게 끝난다. 


돈을 빌려야 했다. 망자의 길을 위해서. 망자를 떠나보낸 이들을 위해서. 모두가 버린 이들에 대해서. 조금 더 쓰레기로 살아도 괜찮다. 조금 더 초라하게 살아도 괜찮다. 나의 초라함이 그들의 명예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옳은 길이다. 


먼 훗날 만나고 싶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망자가 건넌다는 깊은 강을 지금쯤 건너고 있을까. 그곳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명계에서 살아갈 이들은 어떤 이유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잘 모르겠었다. 


대의를 따른다. 대의를 버린다. 신념을 따른다. 신념을 버린다. 믿음을 확증한다. 믿음을 시험한다. 계속된 질문과 자기 의심.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쫓으며 만들어온 정의는 정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한 번 물었었지. 너는 무엇을 하길래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나는 반대로 묻고 싶었다. 너는 무엇을 하길래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냐고. 얼마나 초라한 영혼인가. 얼마나 초라한 인생인가. 


사람이 하는 질문에는 그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가 담겨있다. 같은 무대에 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질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어떤 단계에 도달했는지에 따라 할 수 있는 질문이 달랐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완성될 질문이 달랐다. 


우리가 가진 질문은 동일했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다. 그들 중 몇을 떠나보내고, 그들을 삼도천에 기다리게 했으니 남을 이들이 남은 답을 완성해야 한다. 먼저 간 영혼을 기리며. 같은 질문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형제를 기리며.


오늘에서야 나는 마음속에 있던 두 줄기가 꺾인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소중하다 생각했던 것들도 나 자신을 위해서 해석해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오늘 나는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무엇을 이제는 버려도 되는지. 선명하게 알겠습니다.


그것은 발목을 잡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이었을까. 난 그것이 자랑스러웠으나 이제는 자랑스럽지 않구나. 삶의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나를 보고 있겠지. 살아남은 이가 답을 찾는다. 살아남은 이가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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