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시작은 2023년 6월일 것이다. ‘나’라는 인물의 등장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8월이었다. ‘나’는 축구와 전혀 관련 없는 공간에서 우연히 회장 언니를 만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와서 보니 그녀는 이곳의 엄석대? 아니, 유재석? 아무튼 최고 권력자였다.
이 이야기의 초중반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기장으로 원정을 떠나 치렀던 친선 경기일 것이다. 해운대구 FC 여성 축구단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지 만 1년이 되던 2024년 6월의 일이다. 2024년 6월 2일 일요일 오전 9시, 우리는 홈인 장산 구장 앞에서 해운대구 FC 버스를 타고 기장군 월드컵 빌리지 풋살 경기장으로 향했다. 대학교 새내기 배움터 이후 단체로 버스를 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총무 언니와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을 나누었다. 나는 대체로 권력자의 곁을 좋아하는 것일까?
버스는 금세 기장에 도착했다. 월드컵과는 하등 연관이 없어 보이는 월드컵 빌리지 안에는 육상 트랙을 비롯해 (축구, 야구, 테니스, 소프트볼, 풋살 등) 각종 스포츠 종목의 경기장이 각각 하나도 아닌 두세 개씩 자리하고 있었다. 장산 구장만 알던 우리는 버스 안에서 일제히 감탄사를 연발했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풀어놓으려고 보니 새빨간 유니폼의 기장 FC 여성 축구단은 해가 들지 않는 명당에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딱 그 자리 빼고는 그늘 하나 없고, 송홧가루는 어마어마하게 날린다. 이것이 바로 홈 텃세라는 것인지?
짐을 풀고 이어서 몸도 풀고 10시가 되자 친선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A 팀, B 팀, C 팀, D 팀까지 꾸려 왔는데 기장 FC 여성 축구단은 애초에 인원이 우리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 경기를 한 번씩 뛰고 경기를 뛰지 않을 때는 열렬한 응원단으로 변모하여 역할을 수행했다. 기장의 여전사들은 경기를 두 번씩 뛰고 이내 지쳐버린 건지 청각 예민도가 몹시 높아져 응원 소리를 불편히 여기기 시작했다. 특히 한 여전사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우리 턱 밑에 들이댈 기세였는데 다행히도 그녀가 가진 무기라곤 풋살화가 전부였다. 왜냐하면 축구공도 라인 밖으로 나가버렸거든. 그녀와의 살벌한 눈빛 교환을 ‘올해 상반기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꼽을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축구를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죽기 살기로 승부욕을 불태우는 사람이 있고, 다치지 않고 즐겁게만 운동을 하고픈 사람도 있다. 땀을 흘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아 축구를 하러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니 동생 친구를 만나는 것이 좋아 축구장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르듯 그 안의 각양각색 인간의 욕망들을 마주한다. 여자들이 축구를 하길 바랐던 운영진 아저씨들의 욕망은 처음에 어떤 모양이었을까? 시키는 대로 못 따라가는데 수다스럽기만 한 우리를 바라보는 코치님의 욕망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이렇게 다른 생각과 마음을 한데 모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회장 언니의 간결하고 또 단호한 단톡방 메시지, 원정 버스에서 받은 따뜻한 떡과 비타민 꾸러미들, 그리고 “그 버스 깨끗이 닦아 놓을게요” 하시던 수석 코치님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욕망은 이 이야기가 길게 길게 이어지는 것이다. 모두의 욕망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우리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정기적으로 서로를 만나고 있다. 서로의 사생활에 꼬치꼬치 참견하지 않으면서 매주 얼굴을 보고 안부를 나눈다. 나는 이 느슨한 유대관계가 오래 지속되어 나를 포함한 모두의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보탬이 되기를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