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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기제

[나의 애도(愛道)] - 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by LYJ

의사가 건조한 말투로 말해준다.

“0.76센티 암 맞고요.”

“크기가 작으니, 전이는 없을 걸로 보이고, 이 정도면 수술 후 방사선 치료도 안 할 수도 있어요.”

큰언니는 아주, 매우, 크게,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가 보다.

크게 낙담하진 않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안든다. 어떤 다행인 말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변하게 하지는 못한다.


진료실에서 나와 간호사가 부르길 기다리며 주변을 살펴본다. 젊고 늙었으나 나와 같은 사람들과 큰언니와 같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근심을 품고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그 순간 내 의식이 나 자신에게로 흘러들었다. 아~~~~ 나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구나.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구나.

나는 내가 매우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를 버티게 만든 건 부정적인 힘이 맞긴 하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항상 상상할 수 있는 실패의 깊이를 사전에 가늠하고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기꺼이 감당할 것인지를 정한다. 그러나 결코 포기한 적은 없었다.

나는 부정적이긴 해도 비관하지는 않는 태도로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나를, 주변을 한번 더 보는 사람이다.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쓰는 게 아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통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 두는 방식을 쓰는 모양이다.

회피 방어기제의 마지막은 자살이라고 오은영 박사가 그러더라.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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