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과 무감각 사이

by 김관우

<도파민과 무감각 사이>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요즘 뭐든 1분을 넘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밥을 먹다가도 틱톡을 보고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숏츠를 재생한다.

책을 읽으려 해도 채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손이 핸드폰을 향해 가 있다고 했다.

“집중해서 본다는 게 이제는 쉽지 않아.”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하루는 여섯 살 조카를 데리고 놀아줬다. 장난감을 꺼내자 아이는 몇 분 만에 지루해하며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핸드폰을 들고 알아서 터치를 하더니 유튜브 숏츠를 시청했다. 집중력이 살아나는 게 보였다. 눈이 커졌고 입은 반쯤 벌어졌으며 손은 다음 영상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영상은 20초짜리였고 조카는 수 십 개의 영상을 감상했다. 이제 그만 보고 삼촌이랑 장난감 가지고 놀자-라고 말하자 “어른들도 이것만 보잖아.”라며 장난감을 밀어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은, 무언가를 끝까지 보는 대신 빠르게 넘기는 형태로 굳어지고 있다.

긴 이야기는 인내를 요구하고 인내는 이 시대의 금기가 되어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끝까지 보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탄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예비 시간을 기다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난 요즘 그냥 뭐든 다 스킵 해.”

나는 그 말이 단순히 콘텐츠 소비 습관일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생각했다. 깊이보다는 속도, 감정보다는 반응.

뇌는 도파민을 갈망하고 감정은 그 뒤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하루를 ‘재밌는 하루’라 부르고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극이 사라진 자리엔 묘한 침묵이 남는다. 주말에 만난 또 다른 지인은 요즘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했다. "똑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돼. 지루한 것도 아니야. 그냥, 없어.”

지인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회사복을 입고, 같은 계란 프라이를 구워 먹는다. 출근길 지하철은 늘 비슷한 위치에 서고 회사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같은 말투로 농담을 건넨다.

지인은 웃지만 웃음의 온도를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한다고 했다. "웃고 있다는 것만 알지 왜 웃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미지근한 온도였다.


사람들은 자극의 과잉에 고통을 느끼지만 반대의 상태에서도 쉽게 무너진다.

감정은 움직이지 않고 감각은 평평하다. 날씨가 어떤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은 날짜조차 흐릿해진다. “오늘이 며칠이더라?”라는 말이 농담처럼 던져지지만, 그 속엔 자신이 ‘살고 있다’는 실감이 점점 옅어지는 어떤 불안이 깃들어 있다.

가끔은 그런 무료한 나날이 참 무섭다. 감정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도, 기쁨도, 슬픔도 없다.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바람 없는 바다에 표류하는 배와도 같다.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 흘러가고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도파민의 과잉과 감각의 평탄함. 두 세계는 정반대의 작용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회전문처럼 연결되어 있다.

자극을 반복해 찾다 보면 무감각해지고, 무감각이 깊어지면 다시 자극을 찾아 나선다. 우리는 그 사이를 쉼 없이 왕복한다.


가장 자극적인 것을 봐도 감흥이 없고 가장 조용한 시간도 따분하게 느껴지는 상태. 그것은 마치 맛을 잃은 혀처럼, 아무리 짠 국물을 떠먹어도 짠 줄 모르는 상태와 닮아 있다.

감정은 둔해지고 반응은 과장된다.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한 척” 하면서 살아간다.

억지로 웃고, 인위적으로 놀라고, 가짜로 감탄한다.

진짜 감정은 어디 갔을까. 어쩌면 너무 많은 스크롤 속에 묻혀 버린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자극에 휘둘리거나 무감각에 잠식된 이들. 그들의 얼굴은 다르지만 눈빛은 닮아 있었다. 피로하고 멍하고 조금은 슬펐다.

우리는 도파민이 아니라 기억의 질감으로, 감정의 깊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시간들로 다시 감각을 회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그림책이 떠오른다.

매일 같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나무에 열매 하나가 달렸고 그걸 본 아이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사과는 사실 늘 있었지만 아이는 그날따라 자세히 보았을 뿐이었다. 감동은 그렇게 시작된다.

감정이 다시 깨어나는 데 필요한 건 기적 같은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과 하나에 마음을 주는 일. 그것이 우리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감정의 시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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