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by 김관우

<파랑새>


나는 한때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 안에 실려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정차하지 않고 달리는 급행열차, 그리고 막차 무렵 기차역을 통과하며 철로 위로 흩어지는 달빛의 잔광.

그 조용한 떨림 속이야말로 행복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숨어있는 반짝임을 향해 마음을 보냈지만 현실은 늘 책상 앞이었다.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만이 묵묵히 응시하던 공간에 나의 몸은 머물러 있었지만, 마음은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돌았다.


허기진 감정은 내 안에서 오래된 세입자처럼 살고 있다. 그는 말이 없고 요구도 없지만 나의 선택과 욕망은 언제나 그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는 내 감정의 무게추처럼 작용했고 삶의 모든 활력은 그를 지나쳐야만 겨우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읽었던 각종 도서들, 가끔씩 이루어진 아침 명상과 저녁의 불멍- 모든 것이 그를 쫓아내기 위한 작은 제의 같았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단지 묵묵하게 내 안에서 자리를 지켰다.


어느 해 여름, 우연히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특별히 좋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기회로 간 그곳은 바다와 산이 맞닿은 작은 마을이었다.

하룻밤 머물렀던 방은 보일러가 고장 나 있었고 저녁상에는 감자와 고등어, 묵은지 한 접시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방 안이 한순간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감기도 전에 잠들었고 아침엔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머리를 말렸다.

아무도 나를 증명하라고 하지 않는 그 공간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충만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하염없이 여운에 잠겼다. 이유는 잘 몰랐다. 기차가 멈출 때마다 바다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바다는 점점 멀어졌고 나는 멀어지는 거리감 속에서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끊임없이 쫓는 이상-더 많은 성취, 더 깊은 관계, 더 단단해진 자신-들이 모든 것의 끝에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바다 건너 환상처럼 아득한 것인지.


삶은 어쩌면 점점 줄어드는 ‘조금만 더’의 총량을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가올 순간들을 위해 투자하라는 말은 많지만 정작 ‘지금’을 사는 법에 대해선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을 내일을 위한 재료처럼 소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내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욕심도 미련도 없이 단지 숨 쉬는 그 자체로 괜찮았던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이라는 가치를 알게 되면 의식은 확연하게 바뀐다. 목표를 이루려고만 하는 삶에서,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삶으로 돌아보는 게 가능해진다.

나는 더 이상 달리려고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아도 괜찮았다.

매일 아침 느껴지는 공기, 자주 보는 얼굴들, 식탁 위에 놓인 쿠키 한 조각, 계절이 옮겨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그 안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들이 숨어 있었다. 아니, 그저 보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차는 오늘도 떠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기차를 타지 않는다.

대신, 떠나는 기차를 배웅하며 자리에 앉아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여전히 내 안에는 말 없는 손님이 있다. 그는 예전처럼 허기져 있지만 나는 이제 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한다.


“이제는 어딘가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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