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봄이 계절의 끝자락을 조용히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무들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연둣빛 수채 물감을 여린 잎새마다 힘겹게 그러쥔 채 머뭇거렸지만, 이미 대기는 여름의 언어로 달궈지고 있었다.
햇살은 한낮의 무게를 더하며 푸른빛들을 조용히 밀어냈고, 나는 친구와 함께 낡은 추억을 오랜만에 구경하기 위해 목적지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달성 공원’이라는 네 글자가 디지털로 반듯하게 입력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그보다 빛 바랜 화면을 통해, 달구벌의 옛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아득함으로 목적지를 읽어내고 있었다.
시간의 더께를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에서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법인가 보다.
공원 입구, 넓디넓은 앞마당에 첫발을 내딛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단순히 흙냄새나 풀냄새와는 달랐다.
생의 가장 낮은 층위, 원초적인 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려진 듯한 냄새였다. 누군가는 코를 찡그리며 “동물 냄새”라고 단정 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는 배설물의 향취를 뛰어넘어 수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 존재들의 한숨 같은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강렬했던 냄새는 입구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공원 내부에서는 모든 감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듯했다.
현재와 과거를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공원은 내가 잊고 지낸 시간만큼 넓어져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몇 번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당시의 나는 이 거대한 공원의 아주 작은 모서리, 아마도 화려한 공작새의 깃털이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매점 근처에서만 맴돌았을 것이다.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세상은 명확한 테두리 안에 갇힌 작은 그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풍경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과 기억의 퇴적층 위로 새롭게 축적되고 확장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이였던 때의 나는 단단한 틀 안에 안주했었고, 지금의 나는 틀의 희미해진 경계를 아프게 응시하고 있다.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풍경을 담아내는 내가, 나의 위치가,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시선 끝에 동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육중한 철창 속이나 유리 벽 너머에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살고 있다’는 표현 대신 ‘있었다’는 단어를 골랐다. 그들의 모습 어디에도 삶의 약동하는 의지나 기쁨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생존을 지속하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낮의 태양 아래, 백수의 왕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사자는 한 줌의 나무 테크나 시멘트 바닥 위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다.
어쩌다 움직이는 발길이 닿을 만한 땅은 가루처럼 푸석하게 패어 있고, 패임은 마치 오랜 세월 새겨진 낙인처럼 보였다.
왕의 육중한 움직임에는 분명한 리듬이 있었지만 그 속에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마모시키는 무한궤도와 같았다.
호랑이사의 호랑이 역시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녀석은 육중한 앞발을 모으고 앉아 철창 너머에 있는 푸른 나뭇잎들을 응시했다.
황갈색 눈동자는 나뭇잎의 싱그러움을 담고 있었지만, 왠지 그것은 '보는 행위'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견디는 처절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시선은 공간을 가로질렀고 끝에는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넓은 도랑이 있는 곰사에서는, 곰이 마치 고장 난 장난감처럼 같은 공간을 의미 없이 왔다 갔다 하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했다. 동작이 지나치게 일정하고 단조로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히는 공포감을 자아냈다. 정신병의 일종인 정형행동이다.
곰사 근처의 좁은 우리에 갇혀 있던 침팬지는 더욱 불안해 보였다.
녀석은 시멘트 벽을 따라 자신만의 작은 궤도를 그리며 쉴 새 없이 돌고 있었다.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그러다 쇠창살을 잡고 관람객들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기도 했다.
그들의 행동은 기이할 정도로 단조롭고 강박적이며 예측 가능했다.
나는 동물들의 처연한 몸짓에서 공포나 분노보다 좀 더 근원적인 어떤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단순한 체념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사무치는 기억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한때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드높은 나무를 오르며 자유롭게 포효했을, 그 원초적인 기억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몸. 그러나 기억을 더 이상 현실 속에서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아버린 몸.
그들의 정형 행동은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는, 상처 입은 육체의 마지막 자구책처럼 보였다.
가여웠다.
측은지심, 연민,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감정들이 조건반사처럼 쉽게 내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문득 당혹스러웠다.
내가 동물원의 동물들을 측은히 여길 자격이 있는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진정으로 고통받는 생명들을 위한 순수한 마음인가.
혹시 불편한 진실 앞에서 느끼는 내 안의 윤리적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값싼 자기만족이나 핑계는 아닌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과연 정당했을까.
문득 나는, 견고한 철창이 거대한 스크린처럼 느껴졌다.
스크린 너머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사자도, 호랑이도, 곰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혼란스러워하는 내 눈빛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눈빛 속에는 죄책감과 무력감, 어쩌면 알량한 우월감까지도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불편한 시선은 피부에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불쾌하고 지독히 부끄러웠다.
친구와 나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출구에서 몇 걸음 나갔을 때 즈음, 달성 공원에 들어올 때 나를 맞이했던 짙고 독특한 냄새가 다시 감지됐다.
분명 공기 중에 실려 왔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냄새는 나를 따라 공원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 역시 그랬다.
우리의 침묵은 불편함을 감추기는커녕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막과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동물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과 나의 위선이 거의 맞닿아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철창은 단단한 쇠붙이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철창은 우리 마음속에 더 견고하게 존재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감정들 -이를테면 현실에 대한 무감각한 순응,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차가운 시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교묘한 자기 정당화, 그리고 모든 것을 무뎌지게 만드는 지독한 익숙함- 같은 것들로 촘촘히 엮여 있다.
동물들은 눈에 보이는 철창 안에서 고통스러운 동작을 반복했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창 안에서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거운 숨결의 끝에 마치 낯선 이의 기척처럼, 선명한 한 가지 생각이 오래도록 남아 떠돌았다.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