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의 지혜>
어릴 적 나는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었다.
고집이 세다는 말은 곧,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옳고, 내가 느끼는 것이 진실이며, 내가 듣고 싶은 말만이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첫 번째 말싸움까지였다.
나와 말싸움을 했던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항상 네 말만 맞다고 해. 다른 사람 의견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잖아. 그거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처음으로 내 아집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을 고치게 된 첫 번째 전환점이자 그동안의 행동이 부끄럽고 아파지던 순간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아팠다.
세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제대로 체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서사를 품고 살아간다. 서사는 때로 충돌하고 왜곡되며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대화를 시도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소망이자 이해받고자 하는 열망 때문일 것이다.
나는 타인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것은 단지 귀로 듣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파장을 따라가고 말의 이면에 숨은 상처를 읽으며, 상황에 따라 침묵을 존중하기도 해야 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이따금 그런 방식이 나의 신념과 부딪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알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나의 신념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타인의 말속에서 더 넓은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일은, 가끔 나의 자아를 잠시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성장이다.
누군가의 세계와 그가 걸어온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감정을 잠시 내 안에 들이는 행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다른 가치, 상반된 시선, 익숙하지 않은 언어 앞에서 우리는 쉽게 방어적으로 변한다.
"그건 틀렸어."라고 말하기는 무척 쉽지만 "네 말이 맞아."라고 대답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하나씩 알아간다.
진정한 성숙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나와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일은, 바람에 흔들리는 연처럼 불안정하지만 동시에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는 가능성의 증거다.
며칠 전 한 친구와 영화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의견 차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내가 생각한 거랑 너무 다른 해석인데…'
그러나 "틀렸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네 해석도 재밌네. 어떤 식으로 장면을 분석한 거야?"
그는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말 끝에선 신중함과 책임감, 그리고 나에 대한 존중이 묻어 있었다.
친구의 생각은 내가 모르는 다른 삶의 배경과 맥락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존중은 나에 대한 존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타인의 말을 듣고 수용하는 일은 곧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동시에 수용은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태도이며,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의 다면성을 이해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한다.
많은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일은 혼란스럽지만 풍요로운 시도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 깊은 자아를 마주할 수 있다.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포용하는 여정은 결국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실수한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마음을 닫고 내 말이 옳다고 고집을 피울 때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본다. 그 사람의 말에는 어떤 진심이 숨어 있었는지.
그리고 다시 묻는다. "상대방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간다.
생각보다 더디고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매우 가치 있는 일일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