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태어났더라면 바뀌었을 운명 그리고 옛 어른들의 아들 집착
장모님은 첫 임신 때 유산했었다고 한다
나의 와이프는 K-장녀인데
장모님이 첫 임신을 유산하지 않았더라면
와이프에게 언니 또는 오빠가 있을 뻔했다
만약 장모가 유산하지 않았다면
와이프는 막내로 살았을 것이고
성격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자녀를 둘만 낳은 장인장모를 보건대 세 번째 차례인)
처제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
확인해 보니
나의 어머니도 유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왜 이래 유산 경험이 흔한가
3년 터울인 나와 동생 사이 기간에
유산한 태아가 있었다고 한다
나에게 동생이 하나 더 있을 뻔한 건가?
첫째인 나를 낳은 후 내 동생을 갖기 전 시기
'76년 말 '77년 초 임신 4-5개월에 유산했다고 한다 (성별은 모름)
만약 유산하지 않고 출산했더라면
어머니는 셋을 낳을 생각은 없었기에
내 동생 역시 (처제와 같은 논리로) 태어나지 못했을 거고
나에겐 지금의 3년 터울 남동생이 아닌
2년 터울의 남동생 혹은 여동생이 있었을것이다
유산이 없었더라면 바뀔 수 있었던 운명
유산으로 변경되기 전의 삶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여담으로
나의 아버지는 아들셋 즉 삼 형제를 갖기를 원했다고 한다
(두 형제도 힘든데 삼 형제?)
그래서 신혼 초 어머니에게 아들 셋을 낳아줄 것을 요구했다 (지금은 멸종한 상남자다)
*아버지 논리로는 중간에 딸이 태어나면 no-count라, 어머니는 아들 셋을 충족할 때까지 임신/출산을 반복해야 할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라 아들 선호가 심했다
본인 스스로 장남이기도 했다
비근한 예로 나의 외할머니는 아들(외삼촌) 두 명(1호, 6호)을 낳기 위해, 딸(이모)만 5명(2~5호, 7호)을 낳아
총 7남매를 키웠다.
(7년이면 인생의 1/10 동안 임신)
첫째 아들(나)을 낳고서
두 번째 임신에서 유산을 경험한 어머니는
앞으로 임신을 최소 두 번 더 해서 셋째까지 아들만 낳을 자신도 또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나, 소박맞아도 좋다, 당신이 요구하는 아들 셋은 낳을 수 없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아들이던 딸이던 둘째까지만 낳고 끝내겠다"라고 선언하고
동 내용의 각서에 아버지가 합의해야만 둘째를 갖겠다고 아버지에게 통보했다
한 마디로 "이번 둘째가 나의 마지막 출산이 될 것이고, 이를 거부한다면 이혼하자"는 선언이었다
*70년대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에 "이혼은 소박과 비슷한 말"로,
남자가 (하자 있는) 여자를 쫓아낸다는 뉘앙스였다.
그 시절 이혼녀는 사회적으로 '하자 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내 동갑내기 친구들을 보면 막내일 경우 셋째인 경우가 많고, 장남일 경우 동생은 한 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외동은 거의 없다
가구당 평균 3자녀에서 2자녀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다.
즉 '70년 초중반은 자녀 셋이 기본인 분위기였으나 (그나마 4-5형제에서 줄어든 거)
당시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하여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다들 셋 이상 낳으니 "둘만 낳자"라고 했다,
이는 8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캠페인으로 계승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강경한 입장'과 '산아제한정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타협하여
어머니가 요구한 각서에 합의했고
아버지로서는 다행히(?) 나의 동생은 아들로 태어났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후사는
우리 형제, 즉 '2남'으로 확정되었다
아버지로서는 2/3의 성공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