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만나는 최악의 불청객
호주를 출항한지 어느새 16일째에 접어들지만 그사이 맑은 하늘을 구경한 것은 단 이틀에 지나지 않습니다.
덕분에 매 당직 구해야 하는 자이로 에러 역시 태양을 구경할 수 없던 터라 달랑 이틀만 구할 수 있었죠.
그나마 비는 내리지 않고 덥고 습한 공기의 흐린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밥 교대를 위해 선교에 올라가니 마친 먹장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잠깐 그간의 꾸지리한 날씨의
끝을 보는 듯했지만…
시끄러운 알람과 더불어 MIAMI NATIONAL HURRICANE CENTER에서 URGENT로 태풍경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요즘 가뭄 끝에 물폭탄이 쏟아진다는 우리나라의 소식처럼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가운데 7,8월에는 거의 태풍이 생기지 않는 북미 서부에 떡하니 허리케인 하나가 생겨난 것이죠. 미국에는 다행스럽게도 이 허리케인의 진행방향은 육지 쪽이 아니라 태평양 먼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지만 덕분에 북미 서부 해안으로 진출 중인 본선은 졸지에 항로상에 대형 허리케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움직임이 유동적이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본선의 위치와 정확히 4일 정도 떨어져 있더군요. 2012년, 10번째 태어난 허리케인의 이름은 ‘DANIEL’입니다. 이 곳 시간으로는 내일 정오쯤 가장 왕성한 크기로 커졌다가 차츰 작아질 예정이라니 내일, 모레까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의 주시해야 할 듯합니다.
태풍은 보통 예측된 방향으로 진행하지는 않아도 원래 예측과 최소한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있지만 선교에서 기상도를 바라보시던 선장님께서 뼈 있는 한 마디를 하시더군요, 그 비슷한 방향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단이 일어난다고. 선장님이 3 항사 시절, 호주에서 우리나라로 올라오던 중 태풍을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선장님께서 태풍의 진행방향으로 예측된 곳 반대쪽으로 변침 하고 태풍 피항을 결정하셨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형성된 기압골에 태풍이 걸리면서 애초에 진행하는 것으로 예측된 방향이 아닌 피항한 방향으로 태풍이 덮쳐왔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되셨는데요?'
'지금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지. 솔직히 이틀간 태풍 한 복판에서 두들겨 맞고 나니 그냥 배에서 내리고 싶단 생각만 들더라고.' 항해하면서 여러 가지 악몽 같은 상황이 있었지만 당시 태풍과 함께한 이틀간이 선장님 평생에 가장 긴 날들이었다고도 말씀하시더군요. 그날 이후 기상예보는 100% 신뢰하지 않고 정말 결정을 내리기 위한 참고자료로만 생각하기로 했다는 후문까지.
선교에서 내려가시면서 애초 영향권에 접근하기 전에 피항을 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한 일이니 2 항사와 1 항사에게도 태풍 관련해서 지금 올라온 것과 다른 전문이 오면 언제고 자신을 호출하라는 order를 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이 일반 항해사와 캡틴에게 달리 닥치는 대표적인 상황이 되겠다고 혼자 생각하고 선교 인수인계 게시판에 선장님의 지시를 적어두었죠. 모쪼록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태풍이 조용히 지나가 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TD(Tropical Depression : 열대성 저기압)로 금방 변할 거라는 MIAMI NATIONAL HURRICANE CENTER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Daniel은 Category 4까지 발달하여 이후 일주일간 맹위를 떨쳤다. 본선은 이튿날 선장님의 판단에 따라 태풍의 진행경로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미리 변침을 했고 덕분에 목적지에 2일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태풍을 피해갈 수 있었다.
바다에서 태풍은 영화처럼 당당히(?) 뚫고 나가야할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피해야할 공포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