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은 배들
1945년 8월 22일, 조선에서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피징용자 들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오른다. 일본왕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무조건 항복이 발표된 지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공식적으로 당시 우키시마호에는 한국인 3,725명과 일본 선원 255명이 승선 중이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7,000여 명의 한국인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애초 부산으로 향하기로 했던 배는 24일 오전 방향을 틀어 교토의 마이즈루항으로 향하게 된다. 승선 중이던 이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같은 날 저녁, 폭음과 함께 두 동강 난 채로 침몰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침몰지점 인근의 시모사바가 지역의 어민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고 가장 먼저 달려와 그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대부분 징용에 끌려간 탓에 어민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지만 생존자 대부분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제야 부산으로 향한다던 배가 교토 인근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폭뢰에 의하여 본의 아니게 일어난 사고로 규정했지만 애초 부산으로 향하기로 했던 배가 교토로 향했던 점, 폭파 직전에 일본인 선원 대부분이 구조정으로 탈출했다는 점 등은 아직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524명의 한국인들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애초 승선인원부터 3,725명과 7,000여 명으로 오락가락하는 등 실제 사망자는 5,000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생존자들은 폭뢰가 아니라 한국인들을 수장하기 위한 고의적인 범죄로 주장하고 있는데 4,000톤이 넘는 화물선이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미처 피할 시간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인 승무원들이 배를 변침한 이후부터 서류들을 소각하거나 바다로 폐기하고,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탈출했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들은 1992년 일본 법원에 정식으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2001년 8월 23일, 교토 지방재판소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만을 인정하고 소송을 낸 생존자 대표 15인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냈을 뿐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 사건에 대해 계속적으로 진상을 조사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고 있으나 일본은 그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나 배상 요구를 한 바 없다.
성노예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과 더불어 우끼시마호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수상이 직접 무릎 꿇어 사죄하고 그 피해자들이나 후손들에게 제한된 기간 없이 배상하는 독일과 사과는커녕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고, 잡아떼기 급급한 일본.
우키시마호 사건은 우리에게 여전히 진행 중인 참혹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