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은 배들
1941년, 당시 일본 제국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은 미 해군사관학교 유학, 주미 대사관 무관등을 거친 유학파 장군으로 미국의 산업시설과 경제력, 기술력등을 이미 목도하고 미국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음을 애초에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고노에가 미국과의 전쟁의 승산을 물어왔을 때 ‘무조건 진다’고 잘라말하여 주전파가 득실득실한 대본영에서 미움을 받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오래 버텨봤자 6개월에서 1년’이라 입바른 소리로 일본의 패전을 예측하는 등, ‘근성’ ‘국가에 대한 충성만 있으면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전쟁을 독려하던 주전파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육군강경파들에게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야마모토는 동기가 해군대신이 되는 상황에서 그보다 낮은 서열인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 임명되는데 이는 암살시도로 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주전파들에게 떠밀린 그가 자리잡았던 배가 바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기함이었던 나가토였다.
1920년 11월 15일 완성된 나가토는 세계최초로 16인치(40.64cm)의 대구경 주포를 갖춘 괴물로도 유명했지만 - 이 기록은 나중에 야마토, 무사시의 18인치 주포에 밀리게 된다 - 태평양 전쟁 중 가장 운이 좋았던 배로 기록된 유키카제와 더불어 진주만 기습, 미드웨이 해전,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해전 등 일본이 미국과 건곤일척을 겨루었던 초대형 해전에 모조리 출격하고도 침몰을 면한 행운의 배로도 알려져 있다.
사령장관의 기함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행운의 상징이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군신이 머무는 전함으로 포장되기도 했으니 일본해군에게 이 배가 상징하는 바는 그만큼 신앙에 가깝게 변해갔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가 미군에게 격추되어 전사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 존재만으로 일본 해군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 또 다른 상징이었던 무사시와 야마토가 있었지만.
일왕 히로히토가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던 1945년 8월 15일, 유일하게 일본 본토에 침몰을 면한 채 남아 있던 최후의 전함 역시 나가토였다.
군국주의 일본의 흥망성쇠를 모두 목도했던 유일한 전함이었던 나가토는 1946년 7월 실시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 동원되어 그 전설을 마무리하게 된다. 연합군의 동경 전범재판에서 A급전범들에게 차례로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있을 때 핵실험에 동원되어 그 최후를 맞게된 나가토의 운명은 일본 군국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작은 사건이었다 - 요즘 그때 모조리 죽었어야 할 군국주의의 망령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