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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Jan 04. 2019

三人行이면 必有我師라

사람들에게서 배우다

선박이 땅 위의 세상과 다른 점 중 하나가 땅 위에서는 꼴보기 싫은 사람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지만 선박에서는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이 있다. 그래서, 예외없이 어느 해운회사도 ‘인화’라는 것을 강조하며 오래 배에서 지낸 사람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무덤덤하게 사람들 사이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을 세월의 힘으로 체득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 모든 것이 그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늘 가변성을 가지고 있고 언제 어디서 얼굴 붉히게 되고 서로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쯤되면 그런 상황을 애초 피하는 능력 따위는 필요가 없어진다. 특히, 배에서 큰 직책을 맡은 이들은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해결해야하는 중책(?)을 떠맡게 되는데 이게 참 난감하고 짜증스러울 때가 많은 일이다.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불화 앞에서 일견 부당해보이는 결정을 강요 받는 일도 생기게 되는데 불화의 근거가 업무상 과실처럼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 일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문제로 기인했을 때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생긴다.

후미갑판에서 벌이던 바베큐파티 - 배에서는 잘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배의 분위기는 사주부에서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있다. 사주부는 배의 음식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로 조리장과 조리수, 배에 따라서는 싸롱이라 부르는 견습생으로 구성된 부서로 한 마디로 주방을 관리하는 부서다. 낙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선상생활이다보니 먹는 것만큼은 잘 먹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배에서 만나는 여러가지 복중에 조리장복도 분명히 들어가는 것이겠지. 하여간 그런 이유로 조리장이 요리를 잘하면 그 배 분위기가 좋고 반대의 경우에는 분위기가 안좋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요즘처럼 외국인 선원과 혼승하는 선박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특히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 – 주로 인도네시아 – 의 선원으로 부원들이 구성된 상황에서 조리장들은 이전과 다른 상황을 강요받게 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여러가지 이야깃거리들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가장 즐기는 육류인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않는 무슬림들이 함께 승선하는 상황은 돼지고기로 된 음식이 나오는 날, 무슬림 선원들에게는 아예 다른 음식을 준비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다가오게 된 것. 


이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후자의 상황에서 생기는 문제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분명 ‘일’과 관련된 중대한 사항으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특히 선박에 오래 승선했던 조리장들 중에는 동남아 선원들에 대한 이유없는 차별의식을 가진 이들도 있었는데 그런 이들에게 아예 다른 두 가지 음식을 준비해야하는 상황은 그것이 ‘자신의 일’이란 인식 이전에 번거롭고 귀찮은 일로 간주되곤 했고 그럴 때는 예외없이 선원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곤 했다. 


내가 만났던 완전히 다른 태도의 두 조리장이 있었다. A씨와 B씨, 모두 조리장으로만 승선한 경력이 20년이 되어가는 베테랑이었지만 A씨의 경우, 애초 승선하기 전에 배를 구성하고 있는 선원들의 국적까지 파악하고 준비할 음식을 한 달 단위로 구성해줄 정도의 치밀한 사람이었고 B의 경우에는 ‘늘 그래왔듯’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타입의 주먹구구식의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승선하고 나서 ‘배의 분위기는 사주부가 좌우한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잘먹는 일 앞에서 국적과 직책따위는 필요없는 것

사실 같은 배에서 만난 이 두 사람 중 먼저 승선하고 있던 이는 B였다. 승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 타수와 오일러가 – 다른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대표해서 - 나를 찾아왔고 그들은 조리장에 대한 불만을 말하며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정식으로 이에 대해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겠다고까지 단호한 태도로 조리장에 대한 불만을 재기했다. 그들이 제기한 조리장의 문제는 1. 한국인 선원들과 인도네시아 선원들간의 음식의 질적 차이가 너무 크다 2. 한국인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날에는 인도네시아 조리수에게 인도네시아 선원 음식을 맡기는데 이 친구의 기량이 너무 낮아서 도저히 먹을만한 음식이 준비되지 않는다 3. 이에 대해 갑판장을 통해 항의를 해도 전혀 조치되는 것이 없었다 4. 평소 인도네시아 선원들에 대해 고함을 치는 등 차별대우가 심하다..였는데 아직 배의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알아보고 알려주겠다고 다독거려서 내려보냈다. 


함께 교대자로 승선했던 갑판장에게 전임자에게 이런 일과 관련하여 들은 이야기가 있냐고 했더니 ‘애들이 조리장을 싫어한다.’라는 얘기만 들었다고 했다 – 사실 이런 상황이 가장 난감한 상황이기도 하다. 기관부 사관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인들 음식도 그다지 맛나게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로 인해 전임 선장님이 어떻게든 집에 보내려고 했지만 딱히 하선사유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내려가셨다는 말까지 듣고나니 Crew List에서 가장 먼저 조리장의 승선일자와 적당한 하선시기가 언제인지부터 찾게 되었다. 


함께 승선했던 선장님께 대충 이런 일이 있으니 제가 먼저 상황을 파악해보고 조리장의 모습도 눈여겨 살펴보겠다고 보고한 후 다음날부터 과연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 이런 상황, 참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 불행중 다행인지 다음날 오후, 조리장은 선원교대신청서를 들고 올라와 이번 입항하는 중국에서 교대가 되었으면 하는 뜻을 전했고 – 하선하신 선장님이 회사에 미리 얘기를 해두신 것도 작용한 것이 분명 – 최소한 교대 한 달전에 하선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바로 교대자가 수배되고 보름후 입항한 천진항에서 B씨는 하선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도 금항차에 조리장이 하선하게 된다고 전해주니 이 이야기를 따로 다시 꺼내지는 않기로 했지만 보름동안 살펴본 그의 모습은 사실 동료의 입장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눈에 띄었다. 


새로 신조된 배였기 때문에 전기오븐과 제빙기등 여러가지 장비가 갤리에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장비들을 그냥 먼지만 앉힌채로 방치했고 의욕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않는 대충대충으로 음식을 내놓는 무성의를 보였다. 다들 식사하는 시간에 방으로 사라지는 경우도 늘상 이어졌고 무엇보다도 냉장고 관리도 조리수에게 전가하고 그 시간에 자신은 방에서 비디오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것을 보고 – 어차피 마음이 떠난 탓도 없지 않았으리라 여겨지지만 – 인도네시아 선원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선원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 양반과 길게가지 않고 딱 한 항차만 함께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여간 접안하자마자 새로운 조리장 A씨가 올라왔고 B씨는 접안 다음날, 대리점원이 올라오자마자 짐챙겨서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승선을 마쳤다. 


그에 대한 못마땅함도 어차피 하선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할 때, 새롭게 올라온 A씨의 능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맨날 ‘똥배’만 탔는데 이렇게 장비도 좋고 갤리도 맘에 드는 배는 처음이라는 그. 조리수에게 맡겨져있던 냉장고 관리부터 자기가 하겠노라고 말했고 출항하여 벙커와 부식을 싣기 위해 향하는 여수에서 올릴 부식 리스트까지 준비해서 캡틴과 상의하러 올라가는 그를 보며 그래도 좀 다르겠구나란 기대를 품게 되었는데…그가 갤리를 맡은 그 순간부터 배에 퍼지는 냄새가 달라지게 된다. 양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에게 준비되는 간식은 음료수와 식빵과 쨈 정도였던 상황에서 오븐에서 구워져 나오는 빵이 튀어나오고 돼지고기가 준비되는 한국인 식단에 맞춰 쇠고기나 닭고기가 맛나게 구워져 나오는 인도네시아인용 식단까지. 즐거워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가겠어?’란 생각도 들었었지만 내가 하선하는 날까지 그의 이런 모습은 계속되었다. 


한 달에 한 번, 그 달에 생일 맞이한 이들을 위해 케익을 만들어내고 데이워크 중에 휴식시간용 간식이 쨈과 식빵이 아니라 달걀 샐러드와 쇠고기 패티까지 딸려오는 샌드위치를 마주하게 된 선원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곳간에서 인심나는 법이라며 일단 잘먹어야 힘도 나고 일도 잘되는 법이라던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 도저히 전임자와 (같은 부식비로) 만들어내는 음식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정말 조리장의 태도와 역량에 따라 이렇게 배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나 그제야 확인한 이가 나뿐 아니었던 것이 그동안 밥먹을 때 빼곤 갤리에 얼씬도 않던 선원들이 일과시간이 끝나면 삼삼오오 갤리에 모여 웃음보따리를 터트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몰려드는 해무(海霧),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앞이 하나도 보이지않는다.

연륜도 비슷하고 처음 배에 올라왔을 때만해도 좋은 평을 들었던 B씨가 A씨보다 좋은 평가를 얻지못한 것은 무엇때문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배를 떠난 후에도 두어달 더 승선한 A씨는 떠나는 그날까지 좋은 사람, 좋은 조리장으로 남았고 그가 내리는 날 쭉 함께했던 조리수와 몇몇 선원들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섭섭해했다는 후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태도로 보낸 사람과 그렇지못했던 사람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도 되었지만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반면교사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 어쩌면 더한 모습으로 – 불성실한 모습으로 나의 일과 인간관계 자체를 그르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A씨에게서 배운 것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왕이면 자신의 일로 다른 이들을 질리게하는 것보다 즐겁게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나보다 먼저 터득한 바람직한 선배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삼인행이면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논어의 한 귀절을 떠올리게 된 사건.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 논어(論語)중 술이편(述而篇)


…뒤에 들은 말에 따르면 조리장이 바뀌고나서 다들 식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잘먹어 대부분의 선원들의 체중이 상당히 늘어났다고. 조리장의 특제 스파게티를 흡입하시며 한편으로 당뇨걱정을 하셨던 기관장님 생각도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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