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획

다르게 생각하기

by plannista

ㅣ진짜 기획


광고회사를 오래 다니면서 몇 가지 원칙을 가지게 되었다.


[광고주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자], [야근은 최대한 하지 말자], [직원과의 회식은 갑자기 정하지 말자]

[회의는 간결하게, 최대한 결론을 내자]

‘주님’이란 단어는 주술이 되어 ‘갑/을’ 관계를 강화시키고 대행사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야근을 자주 한다는 건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직업 만족도를 악화시킨다. 갑자기 하는 회식은 누군가에겐 폭력이다. 말이 좋아 번개지, 위력에 의한 번개는 거절하기 힘든 위치인 직원들에겐 폭력이 분명하다. 회의는 잡담이 아니다. 회의에 참석한 많은 구성원들을 위해 명확하게 진행하고, 최대한 결론을 내어야 한다.


광고기획으로 일을 하다 보면, 4가지 상황의 반복인 경우가 매우 많다. 그래서 같은 기획 후배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꼭 기획이 아니라도 주변엔 정말 전문성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동료, 후배들이 많다. 그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반대로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진짜 기획을 하고 있었나?

기획에게 광고주 관리는 매우 중요한 업무지만, 광고주를 열심히 관리했다고 그것만으로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스케줄에 맞춰 광고를 진행했다고, 큰 사고 없이 일 년을 지냈다고, 까다로운 광고주의 컴플레인을 담당 기획으로서 잘 참아 넘겼다고, PT 없이 내년에도 대행을 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 고과에 만점을 주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기획이기 때문이다.


광고주 관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나 역시 좋은 광고주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계획을 잘 지키고 관리해 광고 집행에 기여한 부분도 당연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얼마나 많은 변수에 대비했는지, 훌륭한 판단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여기는 불확실성만이 가득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누군가가 예전 어떤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AE는 광고의 꽃’이다. 하지만 ‘AE를 꽃으로 만들어 준 대부분은 그의 기획능력’ 때문이다.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 직업은 힘들다.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업무의 진행도 중요하지만, 새로움을 창조하고, 새로움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

그걸 우린 ‘기획력’이라고 부른다.




한 번은 광고주가 원하는 걸 그대로 반영한 기획안을 냈다. 회의실은 조용했고, 광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재미가 없죠?’ 그 순간 깨달았다. 광고주는 늘 ‘다르게 생각하는 기획자’를 원한다는 걸.


기획력을 높이려면 브랜드에 대한 관심, 타깃에 대한 관찰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다르게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다. 특히 경쟁 PT가 그렇다. 이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캠페인을 부정하는데에서 출발할 가능성이 높다. 바꿔야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시작이 힘들다. 뭐가 잘못되었지? 캠페인이 나쁘지 않은데, 심지어 평소에 좋은 캠페인이라고 생각했던 광고 캠페인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 힘들다. 그럴 때는 광고주의 생각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다르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봐야 한다.


현재 캠페인의 잘못된 부분을 찾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내가 만약 1년 전 이 광고의 기획자라면 어떻게 다르게 기획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그들이 지금까지 집행한 광고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1년 전에 기획된 광고물과 다른 어프로치를 찾아보다 보면 ‘지금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지’가 보일 수 있다.


아이디어란 아는 것과 아는 것이 만나 새로운 걸 만드는 과정이다.

나는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 전설적인 광고인인 JWT(J.walter Thompson의 James Webb Young의 명언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 내는 예술이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Insight고 Idea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기획력이다.




ㅣ다르게 생각하기


기획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은 캠페인을 잘해온 1위 브랜드의 캠페인을 바꾸어야 될 때가 아니다. 브랜드가 '강력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을 때이다. 만약 나보고 지금 현재 가장 경쟁 PT를 하기 싫은 브랜드를 고르라면, 농심의 ‘스낵면’을 고를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라면은?

수업이나 특강을 할 때에도 물어보곤 하는데, 대부분 답은 5~6개 브랜드에 집중된다. 신라면, 진라면(진매), 너구리, 짜파게티, 안성탕면(특히 부산 지역), 불닭볶음면 등등, 정말 신기하게도 이 브랜드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대답이 나오는데, 10명에게 물어보면 최소 3~4개 브랜드는 나오게 된다. 절대로 통일이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하나다.

‘밥 말아먹기에 가장 좋은 라면은?’ 100% ‘스낵면’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스낵면 광고를 봤다면 그들의 콘셉트를 알 거다. 심지어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밥 말아먹기에 가장 좋은 라면은 스낵면이라고 대답을 한다. 강력함이란 이런 것이다. 스낵면이 면이 얇아서 2분만 끓여도 되고, 다른 라면 보다 양이 적다는 건 제품의 특징이다. 이 특징이 '밥 말아먹기 좋은 라면'이란 '강력한 브랜드 컨셉'으로 완성되었고 일관되고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소비자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브랜드의 경쟁 PT에 참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새롭게 기획한 방향이 강력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래서 남들이 ‘스낵면’ 같은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이런 기획을 해야만 한다.




예전에 ’ 레간자‘라는 대우자동차 브랜드가 있었다. 중형 세단이었지만 현대자동차의 '소나타'에 비하면 판매대수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당시 소나타 광고보다 레간자 광고를 기억한다.

‘쉿, 레간자’이 간결한 카피는 레간자를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차로 만들어주었고, 성능, 디자인, 안전이 중형차 선택의 이유였던 시장에 '정숙성'을 추가하게 해 준 광고 캠페인이었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인식의 싸움을 막강한 브랜드인 소나타가 선점한 곳에서 아무도 없는 곳을 만들어 옮겨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나만의 운동장으로. 다른 곳을 보려 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게 기획의 묘미다.


'다르게 생각하기'가 기획의 경쟁력을 만든다




ㅣ기획의 크리에이티브


흔히 '크리에이티브'라고 하면 제작물을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우린 제작물을 크리에이티브라고 부른다. 나도 브리핑과 기획의도를 설명하고, ‘자, 이제 저희가 준비한 크리에이티브 보시죠.’라고 수도 없이 말을 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크리에이티브'는 '보통명사'일뿐이다. 대부분의 영어의 어원이 라틴어이듯, 'creare'란 단어에서 시작되었고, 1950~60년대 미국 광고시장의 성장기에 'creative'를 새로운 제작물을 부르는 단어로 사용했다.

하지만 ‘creative’는 제작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제작물을 크리에이티브라고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안에 새로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공한 광고들을 살펴보면 '방향'부터 매우 새롭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기획 단계부터 창의적인 시각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런 걸 만들어 내고 기획하는 것은 오로지 기획자의 능력이다.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등의 크리에이터들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제시해 주는 것이 기획이 해야 하는 역할이다. 제작들이 마법사는 아니지 않나?


광고의 차별점은 제작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광고의 차별점을 제작이 끝내는 것이다. 이 차별점, 다름의 시작은 기획 단계부터이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한 부분이다. 그래서 기획은 차별점의 시작이다. 그럼 기획은 어떻게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할 수 있을까? 우린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기획할 수 있다. 제작에게 '제작물'이 차별점을 모두 모은 결과라면, 기획에게는 우리가 작성하는 '브리프'가 결과다. 최선을 다해, 브리프를 통해 차별점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브리프 한 장의 차이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My Story


프로젝트가 갑자기 들어오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그건 입사한 지 일 년도 안된 신입사원이나 20년을 훌쩍 넘긴 임원이나 똑같다. 특히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 거나 관심 없는 업종이나 브랜드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GM대우 기획자를 오래 했지만 크게 즐겁지는 않았다. 차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보고 차를 고르던 수준인 내가, 엔진의 성능, 마력, 안전장치 등으로 차별화를 주는 것들은 신기했지만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가 확실하면 그걸 그대로 강조해도 될 텐데, 자동차라는 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다른 브랜드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큰둥하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선배가 그랬다. ‘그래도 여성 화장품보다는 훨씬 좋잖아. 경험해 볼 수 있는 브랜드인 거에 감사해라. 기업 PR 아닌 것도 감사하고.’


맞는 말이었다. 내가 광고해야 하는 우리 타겟은 꼭 차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와 같이 크게 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타겟을 다르게 생각하니, 그 타겟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 브랜드가 보였다. 그런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 말고 대부분의 기획들은 차를 좋아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수많은 기능적인 차별점을 알아갈 수 있었다. 광고주 또한 당연히 전문가이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이 ‘색다른 디자인’ 정도가 판단의 기준인 사람들을 설득할 새로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기획력’도 저절로 상승하게 된다. 잘 모르는 분야, 브랜드라고 해도 얼마든지 나와의 관계를 설정해서 기획자 스스로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작이 마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획이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다.


"When the world zigs, zag."
"세상이 한 방향으로 갈 때, 반대 방향으로 가라."
- John Heg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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