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브리프
대학 때, 시 또는 단편 소설 중에 골라 창작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진 않았기 때문에 고민 없이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시 창작하기’를 선택해서 썼던 기억이 있다.
각자가 발표를 해야 했는데,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창피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일단 시를 쓴 친구들이 전체의 10~20%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의 글은 말 그대로 작품이었다. 내 차례가 오는 짧은 순간 동안 몇 번이나 그냥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수준의 차이를 절감한 것이다. 짧게 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를 쓰는 작업이 그렇게 큰 퀄리티의 차이를 만들어 낼지 정말 몰랐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길게 서술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한 문장으로 짧게 정리해야 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단 한 문장으로도 명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조차도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단어 하나로 감정을 결정해야 했고, 작은 단어 선택이 시의 운명을 가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의 충격적인 기억이 내 머릿속에 아직도 각인되어 있다.
Brief가 기획자에게 그런 존재다. 기획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브리프다. 처음에 작성하는 팩트북도 중요하고, 나중에 작성하는 기획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광고 기획에게 Brief는 마치 대학 시절 나를 절망하게 했던 시 창작과 같다.
내 브리프를 읽게 되는 사람들은 결코 나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아니다. 블로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과 브리프를 읽고 회의하는 사람들은 시작부터 다르다.
블로그 글 : 독자가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읽는다. 시작부터 긍정적인 태도로 읽으며 기대를 가진다.
브리프 : 읽고 싶지 않은 문서다. 업무 시작의 신호이며, 추가적인 부담을 뜻하기 때문이다.
광고 회사에서 브리프를 환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본부장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서 브리프를 듣게 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혹여 브리프가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될 때, 예상치 못한 저항을 마주하게 된다. 이해해야 한다. 브리프란, '기획에서 제작으로 일이 넘어가는 상징적인 프로세스'이고, 앞으로 며칠 동안의 모든 약속을 다 취소해야 하는 절망적인 통지서이기 때문이다.
왜 항상 기획과 제작은 싸울까? 회의를 하면 기분 좋게 끝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각자의 불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획의 불만
왜 무조건 모르겠다고 하지?
왜 브리프 대로 안 하지?
시간을 벌어 줬는데도 이것밖에 없어?
브리프랑 다르게 했잖아!
광고주가 꼭 넣어달라는 건 왜 안 넣은 거야?
제작의 불만
뭘 하자는 건지 불명확하네
광고주 말을 그냥 전달하는 거잖아?
기획의 의견은 뭐야?
시간이 너무 부족해!
정리하면 기획자는 제작물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불만이고, 제작자는 브리프가 명확하지 않다고 불만이다. 하지만, 이 불만이 오히려 브리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좋은 브리프가 없다면 좋은 아이디어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내 브리프에 질문 폭탄이 쏟아졌던 회의가 있었다.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일부러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저 팀이랑 일 안 한다'라고 다짐했지만, 다음날 그 팀의 제작자들의 모니터 옆에는 내 브리프가 붙어 있었다. 그들에게 전날 전달한 내 브리프는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자 기준이었다. 순간,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크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예전에 광고계 선배 중에 너무 존경하는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제작 입장에서 좋은 브리프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내 브리프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죠?”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뭐가 안 떠올라서 그래.” 그랬다. 브리프를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뭔가가 떠올라야 한다. 만약 브리핑을 듣고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브리프다. 좋은 브리프라면 질문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먼저 나와야 한다.
문제가 명확한가? 단순한 나열이 아닌, 해결해야 할 문제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는가? 솔루션이 차별적인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방향성이 설정되어 있는가? 상상을 자극하는가? 제작자가 브리프를 듣고 즉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는가?
브리프를 쓸 때마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 브리프가 아이디어의 시동을 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공적인 브리프다.
"Give me the freedom of a tight brief."
"명확한 브리프가 주는 자유를 달라."
- David Ogil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