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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Sep 16. 2021

할아버지의 전화기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는 조금은 특이한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숫자 버튼 위로, 불이 들어오는 또 다른 숫자 버튼들이 줄지어 있는, 회사 사무실에서나 쓸법한 전화기였다. 불이 들어오는 버튼 밑에는 번호가 적혀있었는데, 1번은 할아버지 방이었고, 2번은 거실, 3번은 부엌, 4번은 내가 사는 2층 거실이었다. 우리 가족이 그 전화기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회사용 전화기를 가정집에 들여온 아이디어는 우리 할아버지에게서 나왔을 공산이 크다. 그 전화기를 제일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이 2층에서 놀고 있으면 하루에도 대여섯 번 4번 버튼을 눌러 전화를 했다. 늘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뭣들 햄서?(‘다들 뭐 하니’의 제주도 사투리)", "밥은 언제 먹을까", "뭐 먹고 싶냐". 엄마나 아빠가 귀가한 저녁에는 "엄마는 뭐 하시냐", "아빠는 뭐 하시냐"는 질문이 매일 반복됐다. 끼니때가 되면 할아버지의 통화 시스템은 한 단계 더 복잡해졌다. 3번을 눌러 준비가 다 되었냐고 확인한 후, 다시 4번을 눌러 "내려와"라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밥을 먹자는 말인 걸 알았다. 만약 지금 엄마가 내게 그렇게 하루 온종일 전화를 한다면, 나는 바로 짜증을 내거나 어느 정도는 전화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워낙 할아버지의 행동에 익숙해져 있어 짜증이 났던 기억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의 대답이 어차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리라. "뭐햄서?" "놀아요" 아니면 "공부해요". 가끔은 할아버지의 전화를 은근히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엄마가 회사에 나가지 않는 날이나 시험 기간에는 지루한 공부를 멈추어 줄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뭐햄서?" "공부요" "공부해서 뭐 하냐. 잠깐 내려와 봐라". 수화기 너머의 할아버지의 말투와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듯하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계셨다. 할머니 말로는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누워있는 걸 좋아하셨다고 한다. 학생이었던 엄마와 이모들이 학교 갔다 집에 돌아오면 모두들 할아버지 곁에 누워있는 게 다반사였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던 그때에도 할아버지는 늘 누워서 전화를 거신 거였다. 할아버지는 음식도 누워서 잘 드셨다. 내게는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누워서 먹고 있는 귀여운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다.

그렇게 누워계실 때에도 할아버지는 전화기를 놓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베개 옆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는 이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할아버지의 아날로그 연락처 목록이 거기에 있었다. 목록에는 가족들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사무실 직원들, 할아버지가 아들처럼 아끼던 의사 삼촌, 친한 지인들까지 다양했다. 그 메모지를 한두 번 뒤적이다가 수화기를 들어 번호를 누르던 할아버지의 긴 손가락이 눈에 선하다. 통화음이 길어지면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손을 까딱까딱거렸었다. 수화기 너머로 얼른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리셨다.

어떤 날에는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흡족해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적도 있었다. 중국집 배달 주문이 용건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네, 곧 가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전화기는 할아버지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당신이 정을 준 이들과 소통하는 통로였던 것 같다. 전화기와 연락처 메모만 있으면, 할아버지는 침대 위에서도 별로 외롭지 않았을 것 같다. 반짝이는 눈망울로 어디다 전화를 돌려볼까 고민하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집집마다 전화기가 사라진 요즘, 더군다나 할아버지의 회사용 전화기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돌아오는 추석에는 할아버지의 전화기를 사진으로 남겨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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