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정진국 옮김 까치 (2006)
화가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던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가 파리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끌로드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모리조, 드가, 시슬레, 카유보트, 바지유...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파리로, 몇몇은 글레르의 화실로, 또 몇몇은 바티뇰의 마네와 바지유의 화실 주변으로, 낙선전으로, 게르부아 카페로 모여들게 되고, 고매한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며, 비로소 서양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파인 '인상파'가 되어간다.
이 책은 역사서라기보다는 뭐랄까, 등장인물이 아주 많이 등장하는 장편소설 같다. 인상파 화가들의 (거의 대부분 우연으로 이루어진) 만남들과 우정, 갈등, 결별, 각자의 이주 경로, 성공, 실패, 질병까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타피스리처럼 촘촘하게 짜여있다. 그나마 이 모든 이야기들이 대부분 당대에 오고 간 편지나, 당대인들이 쓴 비평, 회고의 글, 인터뷰 등의 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어 역사서로서의 요건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 물론 오류가 있긴 하다. 가령, 르누아르는 리모주 태생인데 파리에서 태어난 걸로 쓰여있다. 인상주의에 관한 중요한 고전이긴 하나 오래된 연구서이기는 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판이 1946년이 나왔다. 내가 못 찾은 오류나, 새로 검증되어 바뀐 사실도 있을 것이다.
길고 긴 시련
책 속의 이야기들이 시작되는 1850년대부터, 좌충우돌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가 열리는 1874년, 그리고 수차례의 갈등을 겪으며 마지막이자 제8회 전시회를 치르게 되는 1886년까지, 인상파 화가들은 그 누구도 화가로서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보지 못한다. 이는 인상파 화가들이 3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살롱전에서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대중의 사랑, 경제적 성과, 미학적인 확신도 없이 그저 자신들이 지향하는 작업만을 해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30여 년이 넘는 시간의 길이를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걸어가는 예술가들이라니. 1863년의 낙선전을 방문한 시인 쟈사리 아스트뤼크는 "두 배로 강인해야 했다. 비바람처럼 몰려들어 모든 것을 과도하게 비웃는 우중의 태풍 아래 꼿꼿이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67쪽) 막막한 현실에 더해 대중의 조소까지 있었다는 증언이다. 이 뿐이 아니다. 지독한 가난 역시 떨쳐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책의 저자인 존 리월드가 인용한 많은 사료들 중에는 모네나 르누아르가 지인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썼던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의 편지는 1868년 모네가 바지유에게 보낸 것이다.
"그림에 진전은 없고 더 이상 명예 따위는 따지지도 않아. 너무 지쳤어....모든 것이 암담해. 게다가 돈은 항상 부족하니. 실망과 모욕과 희망, 새로운 실망-네가 아는 대로야. 르 아브르 전시회에서 아무것도 못 팔았지. 은메달을 받았고(15프랑짜리), 지방 신문에 꽤 화려한 평이 실렸지만, 너도 알듯이 입에 풀칠하기에도 부족하지."(129쪽)
그리고 모두가 지지부진 고군분투하던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바지유는 전사했으며, 정신적 지주였던 마네도 1883년에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이 끝내 역사의 인정을 얻어내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그들이 무던히 애를 쓰고 어렵사리 헤쳐 나가는, 다시 말해 계속해서 실패 속에서 허우적대는 과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제 인상주의는 파리에서 철저하게 악명이 높아졌다. 신문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자화를 실었고, 그들은 심지어 무대 위에서도 농담거리가 되었다. 드가의 친구, 극작가 할레비는 1877년 10월에 대성공을 거둔 희극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 희극 '라 시갈(La Cigale)'의 주인공은 인상주의 화가였는데, 그의 작품들은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마찬가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예컨대 흰구름이 뜬 풍경은 뒤집어놓으면 돛배가 달리는 바다 풍경이 된다는 식이었다."(279쪽)
부댕, 쿠르베, 졸라, 아스트뤼크, 뒤랑 뤼엘, 쇼케, 위스망스, 샤르팡티에 부부...
이 책에 흥미를 더하는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조력자들이다. 나는 특히 에밀 졸라가 등장할 때마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세잔과 나>에서, 졸라로 분했던 프랑스 배우 귀욤 까네가 자꾸 떠올라 재밌었다.(프랑스 영화는 역사적 고증에 매우 충실해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때가 많다. 투사처럼 인상파를 위해 싸우던 졸라가 자신의 소설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하자 인상파 화가들을 실패한 부류로 치부해 버리는 모습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어 오버랩된다. 또 다른 영화인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에서 마네와 모리조 자매가 루브르에서 만나는 장면도 이 책에 등장한다.) 인생의 거의 전부를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걸었던 화상 뒤랑 뤼엘이나, 돈도 별로 없으면서 인상파에 꽂혀 인상파 전시회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빅토르 쇼케도 모두 실제 인물이라 생각하니 대단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정말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인상파의 첫 번째 전시회에 열렸던 해인 1874년에 뒤랑 뤼엘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앙을 몰고 왔던 전쟁이 끝난 직후 프랑스가 누렸던 예상 밖의 경제적 호황으로 여러 경매에서 회화 작품들의 고가 행진이 계속 되었지만, 1873년 말에 돌연 엄청난 불황이 닥쳤다. 게다가, 뒤랑 뤼엘이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려는 노력은 커다란 장애에 부딪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안목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많은 수집가들의 신뢰마저 잃게 되었다. 재고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그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209쪽) 인상파 화가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조력자들도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인상파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바르비종 화파의 한 사람인-부댕이 우연히 어린 모네를 만나 전혀 꼰대 같지 않은 태도로 모네의 친구 같은 스승이 되어주는 장면도 너무 좋았다. 때론 모네와 르누아르가, 때론 모네와 마네가, 때론 피사로와 세잔이 같은 위치에 이젤을 세워두고 같은 풍경과 같은 인물들을 그리는 장면, 그 장면의 역사적 증거나 다름없는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감동을 더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