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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Apr 07. 2024

샤를 보들레르의 파리

샤를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김 2015

이 시는 1869년에 출간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의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에 수록된 산문시다. 시를 읽자마자, 나는 눈을 감은 채 파리의 푸른빛이 도는 회색 지붕들이 “물결”치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 지붕들 아래로 네모난 창문들이 줄지어 있고, 드문드문 노란빛을 내뿜는 창문들이 있다. 방금 해가 진 이후이거나 한밤중이어도 좋을 것이다. 어느 때곤 파리에 어둠이 내린 시간은 보들레르가 가장 사랑했던 시간이었다.  


창문들

  

시의 제목을 마주한 뒤 우선 떠오르는 것은, 창문을 통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광활한 밤하늘에는 자전거를 타고 거대한 달을 가로지르는 E.T.가 있었지’라며 옛 영화를 떠올리는 것도 잠시, 상상의 나래는 시인의 단호함 앞에 무너지고 만다. 이 시에서 보들레르는 반대로 창문을 통해 밖에서 안을 보고 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시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태양이 밝게 비추는 세상보다 창문의 안이 더 흥미로운 세계라니. 나는 시인의 뜻을 공감해 보려 다시 눈을 감고 상상을 시작한다. 파리의 푸른빛 도는 회색 지붕들 아래, 창문의 노란빛이 하나둘 발하기 시작하고, 그 창문들 안의 삶들이 제각기 굴러가고... 문득 나는 이 시에서 창문 안을 보는 행위가, 시인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둠이 내리고, 닫힌 창문들 안에서 촛불이 켜지면, 시인이 고대하던 사색의 시간이 시작되고, 그는 부푼 마음으로 불 켜진 창 안을 바라본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창문 안을 바라보며 시인은 마음껏 자신의 내밀한 것들과 조우한다.

그런데 창문 안에는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근사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타인과 동떨어져 혼자 사는 중년의 부인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엎드린 채 무언가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시를 짓고 있을까?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가련한 늙은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전설 역시 어렵잖게 꾸며냈을 것이다.


중년의 부인으로부터 고독한 시인 보들레르가 보인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분신이기에 시인은 하찮은 단서들로도 부인의 인생사를 훤히 알 수 있었을까. 그건 중년의 부인이 “가련한 늙은 남자”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인은 그들의 삶을, 곧 자신의 삶을 멋진 전설로 변모시킨다. 그러고 나서 시인은 자신이 직접 꾸며낸 전설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면서 되레 슬퍼한다. 자신이 지어낸 전설 속에서도 지독한 고독이 느껴져서였을까. 아마도 자신의 생을 직면하고 돌아보는 일이 무척 지난하고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자리에 눕는다.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살았고 괴로워했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어쩌면 여러분은 나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전설이 진실하다고 확신합니까?” 내 밖에 놓여있는 현실이 어떤 것으로 될 수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내가 살도록 도와주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도록 도와주기만 하였다면.        

시인은 기꺼이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남들이 그 전설이 진실인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상관없다. 나의 인생, 나의 역사이니까.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시쳇말로, ‘창문멍’이라고 해야 할까. 달빛과 별빛이 그윽하게 반짝이는 파리의 까만 하늘 아래에서 창문멍을 하고 있는 보들레르를 상상해본다. 술과 약물에 취해 속이 쓰리고, 정신이 혼미하고, 사람의 온기가 절실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가 불 켜진 창문들을 보는 습관도 아마 그의 지독한 고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에서 주목하고 있는 파리 사람들도 화려한 도시생활로부터 배제된 채 힘겹게 삶을 연명하던 이들이다. 시에 등장하는 중년 부인도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로 홀로 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과부일수도 있고, 카바레에서 은퇴한 무명가수일수도 있다. 그러니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면서 보들레르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불안 속에 사는 이들, 술로 매일 매일을 지탱하는 이들, 노름과 마약에 빠진 이들, 길바닥이 집이나 다름없는 걸인들, 광대들 모두가 보들레르가 지켜봤던 파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관조하는 무용한 그 행위로부터 내밀하면서도 경이로운 무언가를 찾고자 안간힘을 다했다. 그것이 고귀한 사명 같은 일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사무치는 고독과 슬픔, 공허함 속에서도 그는 밤이 어서 오기를, 파리의 지붕들 위로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시인이기에.


창문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가련한 늙은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의 전설 역시 어렵잖게 꾸며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자리에 눕는다.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살았고 괴로워했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어쩌면 여러분은 나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전설이 진실하다고 확신합니까?” 내 밖에 놓여있는 현실이 어떤 것으로 될 수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내가 살도록 도와주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도록 도와주기만 하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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