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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May 05. 2024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로베르 데스노스 『알 수 없는 여인에게』 조재룡 옮김 민음사 2017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1900-1945)의 시를 읽으며, 나는 자꾸 의심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읽고 있는 데스노스의 시구가 과연 현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인의 상상인지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데스노스는, 꿈과 욕망, 무의식으로부터 문학과 예술의 원천을 찾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끌었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나자』에서 데스노스에 대해 “그는 ‘자면서’ 글을 쓰고, 말을 했다.”라고 증언했다.(앙드레 브르통, 『나자』, 오생근 옮김, 민음사, 2008, p. 31.) 실제로 데스노스는 잠이 든 상태나 최면 상태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후대에 남겨진 그의 사진들을 보면 눈이 반쯤 풀린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브르통은 데스노스가 많은 이들과 많은 약속을 했지만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의 시는 1936년에 출간된 『두드리는 문들(Les Portes battantes)』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것이다. 초현실주의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뒤 한참 후에 쓴 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잠에 천착하고 있는 시인을 엿볼 수 있다. 괴짜 중의 괴짜인 데스노스에게 파리의 새벽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파리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나는 저 거리 당신의 발걸음을, 당신을 일찍 깨운 사람들 소리를 듣는다.

뒤이어 당도한 사람의 발걸음에서 나는, 밝아오는 저 새벽녘처럼 명료하게 당신의 발걸음을 구분해 낸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도시에는 끊이지 않는다.

하루 온종일 깨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잠을 청하는 또 다른 사람들.

보이지 않는 별들이, 낮에, 하늘에 떠 있다.

우리 단 한 번도 지나가지 않을 지상의 저 도로들.

날이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새벽에 당신의 발걸음이 내게 들려온다,

부지런한 아침의 일꾼들.


데스노스는 새벽이 다 되어서도 잠을 못 이룬 채 깨어있다. 아마 완전히 깨어있다기보다는 몽롱한 상태로 반쯤은 꿈속에서, 또 반쯤은 의식이 있는 채로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밤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무수히 오고 가며 뒤척였을 시인은 새벽에 이르러 사람들이 내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발걸음을 찾아냈다고 고백한다.           


발걸음: 존재의 모호함

그런데 데스노스는 그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이의 발걸음 소리를 “명료하게” 알아챘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그 확신을 믿을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는 데스노스의 “당신”이 정녕 존재하는 사람인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 속에서 데스노스의 “당신”은 오직 발걸음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얼굴이나 신체에 대한 묘사도, 목소리나 말투, 몸짓, 옷차림에 대한 단 하나의 단서도 없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살아있는 이의 발걸음이 맞긴 한 걸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든다.           

더구나 시인은 그 유령 같은 존재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 사용하는 ‘너의 발걸음’의 복수형인 ‘tes pas’가 아닌, ‘당신의 발걸음’의 복수형인 “vos pas”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잠결에 발걸음 소리까지 구분해 낼 수 있는 이에게서 한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파리의 새벽  

이어지는 시를 마저 읽어보자.


태양이 안개 뒤에서 벌써 서두르고 있다.

강물이 더 한가하게 흐르고 있다.

보도가 발걸음 아래 건조한 소리를 내고 있다.

시계 종소리가 더욱 또렷해진다.

어서 오라 불확실한 3월과 봄의 무기력이여

네가 깨어난다, 네가 환해진다, 네가 폭발한다,

기름때로 가득한 포도(鋪道)의 얼굴,

도시, 내가 살고 있는 도시,

파리.      


파리의 새벽이 묘사된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태양이 막 떠오르고, 센 강은 “한가하게” 흐르고, 저 멀리 아마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새벽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파리의 새벽은 차츰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시인은 곧이어 다가올 큰 시련과 싸울 준비자세라도 취하듯이, 어서 오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불확실함과 무기력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마음상태다. 더구나 모든 이들이 노동을 하는 한낮의 시간은 시인에게 무료하고도 공허한 시간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잠에 집착했던 거였을까. 잠은 시인에게 도피처와도 같은 행위였을까.

1절에서 시인은 “하루 온종일 깨어 있는 사람들”을 말하면서도, “잠을 청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언급했다. 새벽이 도래했음에도 잠을 청하는 이는 아마 시인 자신일 것이다. 의식이 또렷하게 깨어나는 한낮의 불확실함과 무기력을 피해, 시인은 또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꿈속으로 빠져들고 싶었을 것이다. 데스노스에게 잠이 드는 행위는 시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물론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데스노스가 자신의 시에서 위치하고 있는 상태는 잠이 들기 직전, 현실과 꿈이 섞여있는 시간,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시간일 것이다. 낮에도 떠있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별들”을 발견하기 위해 시인은 그저 센 강이 흐르는 소리를, 종소리를, 누군가의 발걸음을 귀 기울일 뿐, 세상으로 발을 내딛지 않고 있다.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다음의 시는 앞의 시 “파리”와 함께 『두드리는 문들』에 수록된 시이다.     


이 밤 모두 안녕     


-네 침대에 누워

네 시트를 돌돌 말고,

봉투 속 저 편지 한 장처럼,

너는 떠올리고 있구나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는 네 모습을.     


-천만의 말씀, 나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다네.

내가 태어난 것은 어제가 아니라네

잠과 저 잠의 신비를 나는 알고 있다네

밤과 저 밤의 어둠을 나는 알고 있다네

그렇게 나는 살아가듯 잠을 잔다네.     


두 사람의 짧은 대화로 이루어진 이 시는 밤과 그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일을 마치 경이롭고 신비로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밤은 어쩌면 낮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었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그 어떤 시구보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듯 잠을 잔다네.”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비로소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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