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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Mar 13. 2024

언캐니(uncanny)한 파리

앙드레 브르통 『나자』 오생근 옮김 민음사 (2008)

초현실주의와 『나자』

1914년 사상 초유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에 절망하는 사이 다다이즘이 탄생했다. 트리스탕 짜라(Tristan Tzara, 1896-1963)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과 같은 예술가들은 서구 문명에 조소하며 특유의 반항적인 태도로 전위적인 예술을 내세웠다. 만약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모든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고, 궁핍하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상상해 보자. 한 순간에 일상이 무너지고 주변에서 죄 없는 이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서구 문명의 오만과 허약성에 대한 일침으로서의 조소, 그것이 다다이스트들이 택했던 태도였다.


초현실주의는 이런 다다이즘을 계승했다. 다만, 다다이즘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조소하면서 결국에는 자기부정에 빠져버린 사이,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을 위시로 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나름의 희망적인 것에서 답을 찾고자 했으며 그것이 바로 무의식과 꿈, 욕망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외침이 집약된 선언문이 1924년에 발표되었고, 『나자』는 그로부터 4년 후인 1928년에 출판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했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즘)에 따라, 이 책을 “미리 정해 놓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것을 떠오르게 내버려 두는 시간의 우연에 따라 이야기해 보려” 했다고 고백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에는 당시의 브르통이 좋아했고, 추구했고, 함께 했던 것들이 상당 부분 담겨있다.      


나자는 누구인가

초현실주의자들은 광기나 충동으로부터 예술의 답을 찾기 위해 기존 사회에서 ‘비정상’이라 여겨졌던 사람들인 정신착란 환자나 영매, 무당, 미치광이 등이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책에 사진과 함께 등장하는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1900-1945) 역시 수면 상태에서 말을 하거나 시를 쓰는,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독특한 작법을 가진 작가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자도 “불가사의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브르통의 집과 가족을 상상만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집을 보고 있어요. 당신의 부인도 보이는데, 갈색머리네요, 당연히 그렇겠죠. 작고 예쁘네요. 아, 그녀 옆에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어요. 그런데 어쩌면 다른 곳에 고양이도 한 마리 있을지 모르지요.”(76쪽) 나자의 말은 모두 실제 사실과 들어맞았다. 나자는 마치 영매나 무당처럼 예언도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웨이터가 하게 될 행동을 미리 예상하거나, 멀리 있는 집의 창문이 열리면서 보이게 될 색을 맞추었다. 또한 훗날 브르통이 자신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되리라는 사실까지 정확히 예언했다! 나자는 정신착란 증세도 보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몸을 부르르 떨거나, 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다. 나자는 그야말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찾던 비이성적인 인간의 총체였다.


브르통은 책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늘어놓는다. 그는 가정이 있고, 집이 있으며, 나자가 필요한 자본을 이튿날이면 마련해 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브르통은 책에서 자신의 초현실주의 동료들을 간간이 언급한다. 밴자맹 페레(Benjamin Péret, 1899-1959)나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1895-1952), 데스노스, 뒤샹 등이 그들이다. 그럼 나자는 브르통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잠시잠깐 사랑에 빠진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브르통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였을까. 나는 이 지점에서 나자에게 일종의 연민을 느꼈다. 브르통은 나자를 통해 초현실의 세계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지만, 나자를 자신과 동등한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초라한 행색의 노동자 계급의 여성 나자는 자신의 신묘한 능력들로 브르통을 “사로잡았으나” 결국에는 버려진다. 나자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지녔다 해도 그녀는 서양의 부르주아 남성들이 인식해 왔던 여성의 두 부류-성모 마리아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서의 여성과 팜므파탈로서의 여성-중 후자에 정확히 들어맞는 여성이었다. 나자는 브르통과 동등한 인격체이기보다는 그에게 초현실의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길바닥에 버려진 ‘발견된 사물(objet trouvé)’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낯선 파리

 

여기, 『나자』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파리를 낯선 곳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브르통이 1918년에 얼마간 묵었다는 ‘그랑 좀 호텔(hôtel des Grands Hommes)’은 프랑스의 위인들을 추모하는 팡테옹(Panthéon)의 근처에 있어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인들에 대한 존경심은 초현실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으며, 오히려 브르통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에 대한 반감으로서 이 장소를 택했을 수 있다. 사진은 역사와는 단절된 채 그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호텔 정면에는 방 안의 불이 꺼진 창이 드문드문 있어 공포영화를 연상시키고, 건물 안 뿐만 아니라 거리에는 행인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차는 호텔이 풍기는 분위기와 짝을 이루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이 텅 빈 채로 서 있다. 오른팔을 벌리고 서있는 동상은 위대한 인물을 조각한 것이겠지만 사진에서는 옆모습만 볼 수 있어 누구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튈르리 정원을 찍고 있는 사진은 사진 속의 분수가 정말 그 유명한 분수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다. 분수의 주변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고,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화면의 오른쪽 구석에는 한쪽 팔을 들어 올린 조각상만 덩그러니 서있다. 분수의 물줄기는 마치 긴 머리카락이 옅은 바람에 날리는 것 같다. 이토록 처연한 분수였다니!


파리의 곳곳은 브르통에게 거대한 아틀리에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는 파리를 배회하며 우연히 마주한 사물이나 장소, 풍경 속에서 욕망의 발현,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 꿈의 이미지 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브르통이 아무런 목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나자를 만났던 곳도 파리였다. 나자를 알게 된 이후에도 브르통은 나자와 함께 파리를 걷는다. 브르통은 나자에게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나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한다. “나는 방황하는 영혼이에요.”라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일이 나자라는 존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려주는 대답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방황의 공간도 역시 파리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과 꿈 사이를, 우연과 필연의 사이를,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오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두 세계를 끝도 없이 넘나들고자 했다. 그것이 그들의 심심풀이 장난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예술행위였다. 『나자』에 등장하는 사진들 속 파리는 현실 세계와 몽환의 세계 그 어디쯤에 존재하는 듯하다. 그 사진들을 통해 우리도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두 세계를 넘나드는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방황하는 나자와도 함께 말이다.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나는 나자를 생각한다. 귀여운 곰 인형보다는, 한스 벨머(Hans Bellmer, 1902-1975)의  마네킹들이 더욱 잘 어울리는 나자를. 에펠탑이 빛나는 파리의 밤거리에서 혼자 몽상을 하고 있을 나자를. 넝마 옷을 입고 팔레 루아얄의 회랑을 무대로 혼자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때 그 노파는 나자가 말한 대로 정말 마법사였을까. 나도 팔레 루아얄을 걷다보면 그런 마법사 노파와 마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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